밤, 감나무를 먹어버린 사슴들, 포도를 몽땅 먹어버린 청설모들과 함께.
우리 집 뒷마당엔 묘목 수준의 밤나무 2그루, 감나무 1그루 ( 1그루는 끝내 죽었다.), 대추나무 2그루, 그리고 포도나무가 있다. 수년 내 열매 볼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한 번씩 바라보면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다.
줄기에 가시를 품고 있는 대추나무를 제외하고는 나무들이 이파리 몇 개 달려있는 묘목들에 불과하다.
포도나무 역시 송알송알 포도송이가 영글어 가기가 무섭게 누군가에 의해 마구잡이로 뜯어먹혀 수년째 맛도 못 보고 있다.
누가 이런 괘씸한 짓을 겁 없이 하는 걸까?
범인들은 바로 동네에 같이 사는 사슴과 청설모들이다.
사실 우리 동네에는 사슴들이 (심지어 작은 여우들까지) 살만한 작은 숲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차선 도로로 나뉜 한편엔 교회 건물뒤로 아직 집이 들어서지 않은 공터가 있고 그 공터는 동네 사슴들이 풀을 뜯고 무리 지어 노니는 장소이다. 도로 반대편은 이미 주택단지로 조성되어 있지만 그 주택단지 끝부분엔 역시 수풀이 우거진 공터가 있다. 이를테면 두 공터의 작은 숲을 오가며 사슴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사슴들은 양쪽의 작은 숲을 오가며 사람들이 앞뒷마당에 가꾸어 놓은 꽃과 나무를 천연덕스럽게 먹어치운다.
게다가 도로에 면해 있는 우리 집의 앞뒷마당은 사슴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이다. 늦은 저녁이나 이른 새벽, 어미와 새끼로 이루어진 가족이나 뿔 달린 아빠까지 있는 사슴 무리들이 마당에서 느긋하게 걸어 다니는 것을 종종 본다. 두어 달 전에는 뒷마당 끝자락에서 어미 한 마리가 출산을 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러다 보니 뒷마당의 밤나무와 감나무는 녀석들이 오다가다 마주치는 간식인셈이다.
나는 환갑 기념으로 심은 나무들이 그 지경이 되어버리니 부엌 창문으로 쳐다볼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내 생전에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주렁주렁 감이 열리고 밤송이를 털 일은 없을 것 같다.
올봄에도 새순이 나기 전부터 부지런을 떨어 말뚝을 박고 그물망으로 나무마다 울타리를 쳤음에도 보란 듯이 '모가지가 긴 사슴'들은 망 너머까지 머리통을 집어넣고 어린 잎들을 냠냠하고 말았다.
이쯤 되자 나도 마당에서 따 먹는 단감과 밤송이 같은 로망을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내 소박한 꿈을 포기하게 만든 녀석들이 성가시고 미워져버렸다.
그러던 며칠 전이었다.
아침마다 하는 동네 산책을 나선참이었다. 훤하게 밝은 이른 아침이었지만 아직은 너무 이른 지 사람 모습은 보이질 않고 드문드문 차들만 지나다니고 있었다. 6시 조금 넘은 시간대 동네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사슴과 청설모들인듯했다.
이곳저곳에서 사슴들이 보였다. 초여름에 태어난 어린 꽃사슴들이 어미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한두 무리를 지나치자 어느 집 앞마당에 또다른 사슴들이 보였다. 그런데 녀석들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어린 꽃사슴을 데리고 다니는 어미 사슴인듯한데 왼쪽 뒷다리 하나를 제대로 짚지 못하며 걷고 있었다.
뒷다리를 많이 다친 것 같았다. 한 다리는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나머지 세 발로만 걷고 있는 어미 사슴의 모습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편하게 걷고 있는 어미 곁에서 아기 사슴은 플을 뜯던 동작을 멈추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동네를 가로지르는 도로에서 차사고로 다쳤으리라. 두어 주 전에도 이제 갓 태어난 듯 어린 사슴 한 마리가 로드킬을 당한채 길가에 쓰러져있었다. 아직 독수리들이 몰려들지도, 치워지지도 않은 채 있는 것이 밤사이나 이른 새벽에 변을 당한 것 같았다.
그 죽은 어린 사슴을 보았을 때도 이제 태어나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은 한 생명에 무척 마음이 아렸는데 절룩거리는 어미 사슴을 보니 더 마음이 쓰였다.
다친 다리가 나아질까?
저 몸으로 데리고 다니는 어린 사슴을 잘 거둘 수 있을까?
다친 어미의 부족한 돌봄에도 새끼 사슴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친 어미 사슴을 바라보던 나는 그동안 내 밤나무와 감나무를 먹어치운다고 뿔을 냈던 것이 살짝 민망해졌다. 사슴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의 집에서 살게 된 것도 내 결정이요, 울타리도 없는 마당에 사슴들이 좋아하는 이파리를 가진 나무들을 심은 것도 내 결정인데 그동안 사슴 탓만을 하고 있었으니..
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숲이 우거졌던 이 동네에 살금살금 침범해 들어온 것은 그들이 아니고 사실 우리들이 아닌가. 내가 사는 동네는 몇십 년 전만 해도 숲과 목초지와 옥수수밭이 펼쳐진 농촌 마을이었다. 사슴들은 그런 이곳의 원주인인 것이다. 그들은 대대로 해오던 습관대로 숲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해가 갈수록 그들의 숲은 사람들이 사는 집들로 작아져갔고 그 한가운데에 도로가 뚫렸고 시속 3-40마일 속도로 내달리는 자동차의 위협을 안고 살게된것이다.
아무래도 단감과 밤은 그냥 사다 먹어야겠다.
포도도 파고라를 타고 무성하게 잎을 피우는 싱그러움만 기대하련다.
내 나무들의 이파리를 다 먹어치워도 괜찮으니 다친 어미 사슴이 어서 낫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린 새끼와 잘 살기를 바란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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