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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Feb 16. 2022

평생을 그리워할 집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나의 마당집


고향 하면 떠오르는 풍경 속에는 항상 그 집이 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낮은 주황 지붕의 집. 마당에는 온갖 종류의 과실수에서 피어나는 향내가 가득하고, 낮은 담장 너머로는 바다가 보이던 집.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해 태어나 6년을 살았던 그 집은 지금은 문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부모님이 여태껏 살고 계신 엄연한 나의 고향집이 있지만, 여전히 나는 주황 지붕의 그 집이 진정한 고향처럼 느껴진다. 지금껏 내가 거쳐 온 스물 두 곳의 집들 중 유일하게 마당을 가지고 있던 집이니 지금부터는 '마당집'이라 불러보기로 한다. 


먼저 고백하자면 마당집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란 건 정확하게 나의 기억인지, 사진을 보며 전해 들은 엄마의 기억인지 확실치가 않다. 반복해 들었던 엄마의 이야기를 나의 기억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3~4살 무렵 자기 어릴 때' 이야기를 자주 들려달라 조르고 - 아직 어린 여덟 살이다 - 내가 들려준 그때의 이야기들을 '~했잖아', '~그랬잖아'의 화법으로 전달하는 아이를 보며 더욱 확신하게 된다. 게다가 나는 대체로 기억력이 좋지는 않은 편이라서 수많은 사진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마당집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험난한 사랑의 결실로 얻은 첫아이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내가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은 없는 형편에 무리해 카메라를 구입했다. 컬러 필름 카메라는 정말이지 무리가 맞았다. 여자는 임신과 출산과정에서 서운했던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다는데 엄마의 사연 앞에 나는 감히 내 서러움을 내놓을 수 없었다. 만삭의 엄마는 마당 수돗가에 앉아 손빨래를 하고 있었더랬다. 접히지도 않는 몸을 힘껏 구부려 물려받은 아이 옷을 빨고 있을 때 담장 너머 콧속을 비집고 들어온 삼겹살 냄새. 뱃속 아이도 먹고 싶은지 요동을 치는데, 고기 살 돈이 없었던 스물셋의 젊은 엄마는 물만 주면 자라던 마당에 난 상추를 뜯어 고기 냄새 반찬 삼아 상추쌈을 먹었단다. 짭조름한 눈물은 쌈장 대신이었으려나. 


동생들이 질투할 정도로 유독 마당집에서 보낸 나의 어린 시절 사진들이 많이 남아있는 이유다. 내가 태어나고도 형편은 달라질 것 없었지만 나의 부모님은 필름값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대문 앞에서 찢어진 종이를 들고 울고 있는 나, 장난감과 책이 가득한 벽 앞에서 친구와 껴안고 있는 나, 마루에서 아빠와 꽃 냄새를 맡고 있는 나, 바다가 넘어다 보이는 담장 앞 빨간 대야에서 목욕하고 있는 나. 


그중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석류나무 아래서 세 명의 남자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나다. 내 평생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시기는 딱 두 번 있었다. 여덟 살짜리 애까지 있는 지금 이십 대 중반 잘 나갔던 나는 어디 자랑할 거리가 못되지만, 다섯 살 때의 넘치는 인기쯤은 자랑해도 괜찮지 않을까? 거기다 이렇게 떡하니 증거 사진까지 남아있으니 말이다. 사진 속 남자 친구들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와 남편에게 나 이런 사람이었다며 슬며시 사진을 내밀어 본다. 






사진에 담기지 않은 마당집의 다른 모습들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마당집은 방과 부엌이 있는 건물 한 채와 화장실과 연탄 창고가 있는 별채로 나뉘어 있었다. 별채의 오른쪽 끝에 있던 재래식 화장실에 어린 내가 빠져서 혼쭐났던 기억이라던가, 장미로 둘러싸인 마당 수돗가에서 물 길어 소꿉놀이하던 모습들이 기억 어느 한편에 흐린 이미지로 남아있다. 바다가 보이는 쪽의 낮은 담장 바깥쪽에는 깨금(까마중)이 잔뜩 열려 여름이면 담장 너머 몰래 넘어가 손가락이 까매지도록 열매를 따 먹던 기억은 유독 생생하다. 


아직 바다를 매워 땅으로 만들기 전 마당집에서는 담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가난했지만 석류, 포도, 무화과, 앵두, 자두, 복숭아, 감나무 등등이 빼곡히 자리 잡은 마당 덕분에 여름에서 가을까지는 늘 아쉬움 없이 배가 불렀다. 봉숭아 꽃 따다 엄마랑 같이 통통 찧어 물들이던 시간은 손톱에 새겨진 주황빛만큼 따뜻했고, 마당에서 딴 오이 찹찹 썰어 엄마와 나 동생이 함께 누워 얼굴 가득 붙이고 있던 시간은 상큼했다. 언젠가부터 마당 한편에 천막을 치고 아빠는 주산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비 오던 날 천막을 두드리던 빗소리와 주황색 알전구 아래 긴 그림자를 드리운 채 일정한 속도로 숫자를 외던 아빠의 모습도 마당집과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가 되었다. 


이렇게나 그리운 나의 마당집이 엄마에게는 마냥 따뜻하고 둥글둥글한 추억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유독 지나간 시간들을 다시 떠올리기를 좋아하는 아이 덕분이다. 나에게는 이런저런 이유로 만족스럽지 못했던 집들을 아이는 모두 다 너무 좋았던 곳들로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나는 가급적 숨기고 싶은 지금의 집마저도 아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좋은 곳'이라는 걸 알고 나니 마당집에 대한 엄마의 반응이 이해가 됐다. 


고향에 가면 가끔 마당집을 보고 싶어 같이 보러 가자 엄마를 졸랐다. 그럴 때면 엄마는 늘 '뭐 그렇게 좋았었다고...' 미지근한 태도로 거절하곤 했다. 마당집에 대한 엄마의 기억은 문간방에 얹혀살던 것으로부터 시작해 어떻게든 돈을 더 벌어야 해 가게가 딸린 집으로 이사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야 했던 버거움과 양가의 반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시작된 신혼의 알싸한 아픔. 그런 감정들이 마당집에 대한 엄마 기억의 베이스였다. 아마도 그녀는 마당집 곳곳에 그녀 사랑의 결실이자 유일한 기쁨인 나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마당집을 사랑해보려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평생을 그리워할 나의 마당집. 공간은 각자가 가진 시간의 서사 속에서 각각 다른 의미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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