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우, <반쪽의 이야기> 리뷰
태초의 인간은 네 개의 눈, 팔, 다리와 두 개의 코, 입 그리고 두 개의 몸이 맞대고 있는 형태였다. 당시에 인간들은 두 배의 신체 기관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지금의 인간들보다 훨씬 더 강력했고, 이 힘은 신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그 힘을 두려워했던 신들은 인간을 지금 우리의 모습처럼 두 쪽으로 갈라놓았고, 둘로 나뉘게 된 인간은 원형으로 돌아가기 위해 잃어버린 반쪽을 갈망한다. 플라톤의 「향연」은 그 반쪽에 대한 갈망이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앨리스 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반쪽의 이야기>(The Half of It, 2020)는 영화 <헤드윅>(2001)에서도 모티프로 쓰인 적이 있는 이 「향연」 속 담론을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주인공 앨리 추(리아 루이스 분)의 반쪽을 찾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런데 <반쪽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랑'에 머물지 않고, 그 사이에 사랑으로 변화하는 앨리의 '성장드라마'를 숨겨둔다.
앨리의 성장은 그녀가 머무는 '공간'으로 엿볼 수 있다. 앨리는 역무원인 아버지와 둘이서 미국의 작은 마을인 스쿼하미시에 사는 동양인 여고생이다. 그녀는 스스로 사람들을 밀어내며 혼자가 되려 한다. 이때 앨리는 스쿼하미시 기차역을 관리하는 작은 역무실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폴 먼스키(대니얼 디머 분)의 부탁을 받고, 그를 대신해 자신도 사랑하고 있었던 애스터 플로레스(알렉시스 러미어 분)에게 러브레터를 보내게 된다. 편지를 쓰기 위해 애스터의 관심사들을 조사하면서 앨리만의 세상이었던 역무실은 점점 애스터에 관한 정보들로 채워진다. 시간이 흐르고, 앨리는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의 장난 때문에 오랫동안 준비한 연주회를 망칠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 폴의 도움으로 연주회를 무사히 마친 앨리는 자신을 가둔 역무실을 벗어나 그와 함께 친구들이 있는 뒤풀이 장소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레즈비언이었다는 사실을 성당 미사에서 공개한 후, 앨리는 마을 밖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용기를 얻는다. 기차와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마을 밖으로 떠나는 기차를 탈 용기가 없었던 소녀는 사람들에게 진짜 자신을 드러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가둔 작은 도시를 떠날 수 있게 된다.
애스터와 앨리가 함께 비밀 호수에서 목욕하는 장면과 앨리가 스쿼하미시를 떠나는 기차 안 장면을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순간으로 뽑고 싶다. 앨리가 폴을 대신해 ‘스미스코로나’라는 가명으로 애스터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땐 역무실 창문에 비친 모습과 실제 앨리는 분리되어 보인다. 하지만 스미스코로나가 아닌 실제 그녀의 이름으로 애스터와 함께 갔던 호수에선 물에 비친 자신의 반쪽 모습과 겹쳐 「향연」 속 완전한 인간에 가까운 형태가 된다. 이 장면에서 앨리는 폴이나 애스터로 비유되는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이 아니라 자족적으로 완전한 모습이 된다. 그리고 역무실과 기찻길에서 벗어나는 순간에는 친구 혹은 짝사랑하는 연인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최종적으로 벗어나야 할 스쿼하미시에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탈출한다. 그래서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들과는 달리 앨리는 기차 밖에서 뛰어올지도 모르는 자신의 반쪽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역시 그녀를 응원하고 싶었는지 창 안으로 한 줄기 빛을 비춰준다.
<반쪽의 이야기>는 다소 상투적인 플롯과 클리쉐적인 인물들이 엮어가는 미국 하이틴로맨스의 전형이다. 하지만 동양인 레즈비언을 주인공으로 위시하는 만큼 인종과 퀴어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는다. 다름에 대해서 발언하는 이 영화의 성취는, 주위의 인정과 그들의 일원이 되는 편의적인 결말이 아니라 앨리가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는 것이다. 앨리는 이제 막 스쿼하미시를 떠나는 기차에 올랐을 뿐이지만, 다행히 무기력해 보이는 기차 안 사람들 사이에서 앨리의 얼굴에는 결연한 활력이 서려 있다. 선명하고 우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들을 전달하는 <반쪽의 이야기>를 응원하고 싶은 이유는 앨리의 삶에서 다름을 부족함으로 착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타인과 비교해서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체로 완전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한 번 더 손에 쥐어보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