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로 다시 보는 걸작들, 넷플릭스 편
<타이페이 스토리>는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감독 에드워드 양 감독의 1985년 작입니다. 원제는 <청매죽마>로, <공포분자>,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더불어 에드워드 양 감독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타이페이 3부작 중 하나이자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죠. 캐스팅 목록에서 특이한 점이 눈에 띄는데, 에드워드 양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세계적 감독 허우샤오시엔이 주인공으로 분했습니다.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는 것을 보면, 영화를 잘 찍는 감독은 영화에 잘 찍히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인물들의 한 손에는 언제나 담배 한 개비가 들려있습니다. 그들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는 스크린 대부분을 채우죠. 어떤 프레임에선 담배 연기만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연기는 희미하게 허공으로 퍼져나가며 흩어집니다. 마치 80년대 대만의 과도기 속 오래된 연인 아룽(허우샤오시엔)과 수첸(채금)의 관계처럼 말이죠.
“저녁마다 창밖을 바라보며 야구를 하고 집에 돌아가는 아룽을 기다렸다.”는 수첸의 대사는 퍽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요? 관계에는 연민만 남아 마음을 잃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을 끄고 나서야 겨우 상대에게 진심을 꺼낼 수 있을 만큼 무기력해 보입니다. 그마저도 “우리 미국으로 가는 건 어때?”라는 제안은 “이민 가서 뭘 할지가 문제지.”라는 대답으로, “결혼하자.”라는 제안은 “결혼이 답이 아니다”라는 대답으로 겉돕니다. 상대가 진정 원하는 것을 바라볼 힘조차 상실해 버린 채 담배 연기처럼 부유하는 그들은 상대를 더욱 우울하게 하고 지치게 만듭니다. 에드워드 양 특유의 차가운 톤의 화면은 이런 무력감을 화면 곳곳으로 퍼지게 하죠.
그들의 무력감은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요? “이 건물들을 봐. 어떤 건물이 내가 디자인한 건지 모르겠어. 전부 똑같아 보여. 내가 있든 없든 점점 더 무의미해지는 것 같아.”라는 대사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자신들이 놓여있는 공간에 주목합니다. 마천루로 뒤덮인 공간과 아직 마천루가 되지 못한 공간들. 옥탑의 네온사인이 빛나는 공간에서 누군가는 도박에, 술에, 빚에 찌들어 갑니다. 더욱 빠르게 높아져만 가는 공간 속에서 80년대 대만 사람들은 더욱 빠르게 낮아져 가고 있죠.
영화 속 그들은 오래된 사람들입니다. 도시화의 과도기에 선 대만은 그들을 포용하지 않으려 하죠. 아룽 역시 야구를 그만둔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야구를 하던 당시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인물입니다. 다트 던지기를 하던 도중 ‘야구를 했다면서 왜 그렇게 못하냐’는 도발에 ‘네가 야구에 대해서 뭘 알아.’라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걸 보면요. 그리고 그는 자신을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결혼한 옛 연인의 곁을 여전히 맴돕니다. 그는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야구를 했던 당시의 자신을 떠올리려는 몸짓으로만 보일 뿐이죠. 이런 것을 보면, 그는 스스로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억에 휩쓸리듯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신의 위치를 잃어갑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만큼 아룽이 머물러 있는 과거는 더더욱 빠르게 뒤로 쳐져 가는 것이죠.
이 영화가 표면적으론 치정극이긴 하지만, 에드워드 양의 영화답게 별다른 감정의 고조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스크린을 여러 상징과 단서들로 채워 해석을 요구하는 어려운 영화도 아닙니다. 단지 응시할 뿐이죠. 그런 점에서 지루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당대의 정신적 공기를 드러내 주는 알맞은 리듬이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