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괴물>(2006)과 코로나 시대의 접점
코로나가 전 세계에 퍼지던 작년 초, 나는 도쿄에 살고 있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도쿄에는 확진자가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를 비롯한 일본에 살던 한국인들은 그 보도가 허위라는 걸 알고 마스크와 생필품을 챙겼지만, 일본인들은 자국 정부를 믿고 평소와 같이 바깥 활동을 했다. 심지어 도쿄 길거리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도 드물었다. 공교롭게도 도쿄 올림픽이 내년으로 미뤄졌다는 발표와 동시에 도쿄의 확진자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도쿄가 락다운(Lockdown) 위기에 몰리자, 내가 일하던 가게가 문을 닫았다. 나는 한 달 뒤 한국으로 귀국했는데, 일자리를 잃어서이기도 했지만 안전한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부모님의 권유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에선 코로나가 사실상 종식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몇 달이 흐르고, 제일사랑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제2차 확산이 시작됐다. 일본은 정부, 한국은 종교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코로나의 확산은 성찰 없는 믿음이 얼마나 그 외부의 것들을 불신의 대상으로 간주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내가 15년 전 영화인 <괴물>을 다시금 꺼내 글을 적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봉준호 감독은 이미 2006년에 이와 같은 현상을 예언이라도 한 듯, <괴물>에선 재난 속 믿음과 불신에 관하여 현재 코로나 시대와 겹쳐지는 장면들이 왕왕 눈에 띈다.
영화 비평가 허문영의 말처럼, <괴물>은 실재가 아닌 표상과 싸우는 가족들의 이야기다. 그는 오인된 출발선에서 시작한 영화는 종착점에 도착해서야 그 게임 자체가 오류였다는 게 드러난다고 썼다(허문영, 「최종 승리자는 괴물이다」). 나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 강두(송강호)의 가족은 미군이 방출한 포름알데히드로 탄생한 괴물과 싸워 승리하지만, 치열한 싸움 끝에 강두의 가족에게 남은 것은 희봉(변희봉)과 현서(고아성)의 죽음과 사람들이 떠나버린 한강의 매점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제로 혹은 마이너스로 회귀하는 장르영화가 천만 관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결말이 관객들이 바라는 것을 이뤄주지 못했다면, 과정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당겨 말하자면, <괴물>의 과정은 왜곡된 정보와 오인된 믿음의 연쇄로 벌어지는 소동에 가깝다.
코로나는 바이스러다. 즉, 비가시적인 재난인데, 보이지 않는 실체에 관한 진술은 필연적으로 크거나 작게 실체와 어긋나고, 이에 관한 정보를 수신하고 신뢰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괴물이 한강을 휩쓸고 지나간 발단 이후, 공동 영결식장에서 질병관리국 직원은 바이러스에 관한 설명을 뉴스로 대체하려고 한다. 그런데 뉴스가 나오기 전, 관련 기관 관계자들이 들이닥쳐 유가족들을 잡아간다. 뉴스는 정작 설명을 들어야 할 대상자들이 이미 격리된 뒤에야 정상적으로 방송된다, 또한, 정부가 현서의 구출 작전에 개입하지 않고, 한 가족이 괴물이 사는 한강에 뛰어드는 이유는 경찰이 강두가 받은 전화 내용보다 차트에 적힌 통화 기록을 신뢰했기 때문이고, 강두가 감금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존재하지 않는 바이러스를 역이용한 덕분이다. 오류가 발생하는 이유는 바이러스의 존재가 누군가의 입이나 혹은 미디어를 통해 실체화되기 때문이다. 희봉이 죽은 뒤 이어지는 뉴스 보도에서는 ‘에이전트 옐로우’에 관한 설명을 하는데, 뒷배경으로 미군의 훈련 장면이 나온다. 이 푸티지 영상은 앵커의 보도 내용과 유사해 보이지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관련 없는 영상의 나열이다. 영상의 속성 중 하나는 실체가 아닌 실제를 가장한 복제된 실체를 전달한다는 것일 텐데, 그래서 미디어가 전달하는 정보는 미디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실체와 미세하게 어긋나며 호도된다. 문제는 그것이 온전히 신뢰할 때 발생한다. 강두의 가족이 총 한 발에도 쓰러지는 연약한 괴물에게서 딸을 구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잘못된 정보를 신뢰한 정부와 사람들이 강두의 가족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언어가 옮겨지는 과정에서도 이런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괴물>에는 다른 언어를 통역하는 장면이 두 차례 등장하는데, 이 장면들은 언어가 인용되고 재인용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장면은 검사실에서 미군과 통역관이 하는 대화다. 미군이 먼저 말하고 통역관이 통역하는 과정에서 뱉는 대사는 거짓이다. 그리고 통역이 끝나고 둘이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자막이 등장한다. 이때 미군은 바이러스가 없다는 진실을 밝히는데, 강두는 통역이 아닌 미군의 발언을 통해 진실을 알아챈다. 두 번째는 강두와 세주(이동호)가 사람들이 모두 떠난 한강에서 뉴스를 보는 마지막 장면이다. 이때는 앞서 말한 미디어와 통역이 동시에 이뤄진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스스로 고백하듯, 앵커의 목소리를 통해 “이 모든 일이 잘못된 정보에서” 벌어졌음을 시인한다.
실체를 목격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불신은, 불신 자체를 신뢰한다. 영화의 종반부, 한강에서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은 영화 내부에서 바이러스의 유무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근거 없이 바이러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정부와 대척점에 있는 바이러스 보균자인(라고 보도된) 강두는 우상화된다. 강두의 목적과 바이러스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시위대에게는 불신이 믿음이 되는 것이다. 진실이 부재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괴물>이 끝난 뒤에도 확인할 수 있다. <괴물>이 흥행할 당시, 인터넷에서는 현서가 살아있고 숨겨진 쿠키영상에는 현서가 병원에서 깨어나는 장면이 있다는 루머가 돌았다. 그 이유는 <괴물>에서 현서가 죽었다는 정보가 영화 속에 명징하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이 부재한 상황은 새로운 믿음을 파생시키고, 그 믿음은 또 다른 사실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괴물>의 결말을 두고 누군가는 허무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장르영화에서 현서의 죽음과 제로로 돌아온 결말은 동의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러나 나는 봉준호 감독이 내린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역시 코로나의 상황과 연관 지어 살펴볼 수 있는데, 재난에게서 승리한 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전리품이 아닌 폐허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과 접촉하여 이루어지던 활동에 제약이 생기면서 일상의 영역까지 침범한 코로나는, 유려하게 흐르던 사람들의 세계에 균열을 새긴다. 그래서 코로나에 직접적으로 인명피해를 입은 당사자와 유가족, 그리고 일자리를 잃은 소상공인을 차치하고서라도 일상을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코로나는 예후를 고민하게 한다. 당연하게만 여겼던 일상이 정체되고 무너졌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코로나가 벌려놓은 틈을 목격한다. 그 틈은 코로나가 종식된 후에도 건재할 것이다. 어쩌면 재난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해야 하는 것은) 재난이 발생했던 자리를 응시하며 총구를 세우는 강두와 같은 자세뿐일지도 모른다.
*해당 글은 <씨네리와인드>에 먼저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