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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구 Mar 21. 2023

여행가방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여행 가방을 샀다. 오래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일이다. 가방을 사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짐을 싸는 거였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방은 허기를 채운 짐승의 배처럼 빵빵해졌다. 소파 옆에 세워두고 흐뭇하게 바라본다.

 스무 살 즈음이었다. 김 화영님의 산문을 읽던 나는 지중해로 떠나는 꿈을 꾸었다. 코발트 색상으로 넘실대는 바다와 노란 빛깔로 쏟아지는 지중해의 햇볕은 항상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특정한 지명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이 남프랑스의 휴양 도시였는지, 이탈리아 반도의 어느 섬을 염두에 둔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항상 지중해를 떠올리면 `코발트 색상의 바다와 노란 햇살`이 생각난다. 나는 아직 지중해를 가보지 못했다. 어쩌면 지중해를 가게 된다면 내가 꿈꾸던 바다와 햇살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 두렵기도 하다.

 한 곳에서 오래 살고 있는 나는 쉽게 떠나지 못한다. 집도 가게도 오랫동안 그대로다. 변한 것은 시간과 나의 모습이다. 뿌리를 내린 식물처럼 나는 떠나지 못한다. 내가 살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고, 새로운 사람들이 안착했거나 빈 점포로 남아있는 곳도 여럿 있다. 

 퇴근한 밤이면 가방을 쌌다. 짐을 꾸리면서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아침이면, 소파 위에는 가방 속의 짐이 애완견이 토해놓은 토사물처럼 널브러졌다. 출근을 했고 밤이면 다시 가방을 꾸렸다.

 나는 아직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사이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문상을 다녀왔다. 문상 가는 도로가에는 멀구슬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멀구슬나무 열매는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나도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다. 떠날 준비는 다 된 것 같은데 가지에 매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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