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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구 May 19. 2023

추억으로 자라는 나무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D- 365

작년에 제주도 (돌 문화 공원)에서 썼던 엽서가 오늘 집에 도착했다. 우리 가족이 제주도를 여행하다 들렀던 (돌문화 공원)에서 서로에게 보낸 엽서다. 이제 일 년의 시간이 지나 수취인에게 전달된 거다. 우편물 수거함에서 세 장의 엽서를 발견했을 때는 좀 놀랐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까맣게 잊고 있던 어떤 물건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내가 쓴 글을 읽는 쑥스러움으로 엽서를 보자 한 자리에 앉아 엽서를 고르고 쓰던 그때가 생각났다. 셋이 보낸 즐거운 시간과 행복했던 순간이 추억의 이름으로 다가왔다.

 붉은색의 숲길이 녹색잎과 대비되던 비자림 숲과 다리를 사이에 두고 밀물에는 호수가 되고 썰물에는 모래 바닥을 보이던 숙소 앞의 한적한 바닷가. 안도 다다오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었던 유민 미술관은 미로를 찾듯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그 깊은 곳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아르누보의 유리 조형품들. 저녁을 먹으러 찾아간 식당 뒤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과 그곳에서 만났던 고양이.

 어디였을까?. 노년의 부부 여행객을 만난 곳이. 흰머리의 구부정한 남자는 백팩을 메고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들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사연이 있겠지`하며 지나쳤던 것 같다. 


D-280

 그리고 한참이 지났을 때 아내가 불쑥 물었다.

" 어머니 모시고 제주도 여행 한번 갈까? "

 어머니는 허리가 좋지 못해 지팡이를 짚어야 하거나 노인용 유모차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차멀미는 하지 않아서 드라이브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두 분을 태우고 다니다 보면 뒷자리에서 다투듯이 목소리가 커지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도로와 지명에 관해 서로 우기느라 그랬다. 예를 들면 지나온 터널이 몇 개였다는 둥, 아까 지나온 터널보다 금방 지나온 터널이 좀 더 길다는 따위의 사소한 것들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휴게실에서 아버지를 기억해 떠올리고 한참 동안 그때 얘기를 하신다. 91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기억력이 좋은 걸 보면  다행이다 싶고 길가에 세워진 새로운 건물을 보면 호기심 많은 소녀처럼 물어본다 길을 잘못 들어서 조용히 유턴해서 가려고 하면 금방 눈치채고 민망함에 꼭 한마디를 보탠다.

" 음마, 아까 왔던 덴디?? "


D-234

 아내가 제안한 `제주도 여행`은 누나 식구와 의견 일치를 이뤄 정작 당사자인 어머니만 빼고 우리끼리 진행하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비밀에 부친 이유는 미리 알았을 때 일어날 불상사 때문이었다. 아마 알고는 절대 안 간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전에 고령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변에서 하룻 사이에 돌아가신 어른들을 보다 보니 건강이 걱정되기도 했다. 나이 드신 분들은 내년을 기약하지 못한다. 어찌 될지 모른다. 고모도 그랬다. 그해 여름 복숭아를 보내드렸더니 달고 맛난 복숭아를 보내줘서 잘 먹었다고 연락이 왔다. 내년에도 사드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가을을 못 보고 돌아가셨다. 어머니에게 알리지 못한 이유는 혹여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미리 알려드렸다가 동티 날까 싶은 마음이 있었다.


 D-9

 일주일쯤 남겨두고 어머니에게 제주도 여행을 가자고 말씀드렸다. 준비는 다 끝났고 옷가지 몇 개만 챙겨서 가면 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안 간다고 완강하게 말했다. 막내인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한다. 결혼 후 몇 년 지나서 호칭을 바꿔볼까 싶은 생각에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존대어를 써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머니`라고 부르는 순간 알았다. 그렇게 부르는 순간 `울 엄마`가 사라지고 새어머니가 생겨나고 있음을. 그래서 나는 결혼 후 삼십 년이 지나도록 엄마와 너나들이를 하면서 존대어를 쓰지 않는다. 그걸 마치 막내의 특권인 것처럼 우기면서. 아직도 나는 반말로 떼를 쓰고 반찬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니 어머니가 안 간다고 해도 나에게 말이 통할리 없었다.

" 돈 쓴디 머 하라 돌아 댕긴다냐? " 

" 걱정 말소. 제주도 사는 친구가 다 예약해 부러쓴께. 요 가방에 엄마 짐만 챙겨서 여 불소." 

나는 우격다짐하듯 말하고 미리 준비해 간 작은 캐리어를 놓고 온다. 


D-2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목도 칼칼하고 가래가 나온다. 일단 잠을 더 자본다. 아내가 걱정되는지 약을 사러 간다. 일요일이라 병원은 문을 열지 않았을 테니 약국에서 종합감기약을 사 오라고 했다. 코로나 자가키트도 함께 사서 검사를 하기로 했다. 몸살 감기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코로나 양성이면 큰일이다. 고령의 어머니가 있으니.

아내가 간호사처럼 자가키트로 검사를 하고 나는 드러눕는다. 이십 분쯤 흐르고 난 후 자가키트에 그려진 줄을 본다. 자가키트에 한 줄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 아버님은 임신이 아니네요." 

아내는 간호사들의 말투를 빗대서 말한다. 나는 희미하게 웃고 다시 침대로 누우면서 깨우지 말라고 한다.


D-1

 어제는 하루종일 잠을 잤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잠은 자도 자도 계속 밀려오는 어둠처럼 나를 덮쳤다. 그렇게 잠을 잔 덕분인지 오늘은 움직임에 문제가 없다. 목은 여전히 칼칼하고 가래가 섞여 나오지만 병원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것 같다. 이 정도 몸상태는 오랜 경험으로 체득해 본 적이 있다.

일을 마치고 그동안 준비해 둔 짐을 점검한다. 거의 준비는 끝난 것 같다. 마지막으로 푹신한 옷사이로 삼페인을 넣고 캐리어의 지퍼를 채운다. 노란색 라벨이 특징인 뵈브 클리코를 올 초에 사두었다. 제주도의 밤에 엄마와 한 잔 하고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건배를 하고 서로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았다. 가족끼리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만나서 나눈 얘기도 필요하지만 생활의 묵은 때를 걷어내고 서로에 대해 집중하다 보면 한편에 치워둔 서운함 감정을 알아채기도 할 테니까. 나는 살아오면서 맘속에 품었던 몇 가지를 엄마에게 물어볼 요량이었다. 


D-DAY

 비행기를 탄 어머니는 창밖을 계속 보고 있다. 온통 구름이 덮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린아이처럼 신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로 아래쪽은 구름이 쫙 깔린 상태다. 비행기가 제주도 인근에 왔는지 고도를 낮추자 구름 사이로 섬의 표면이 드러난다. 어머니는 눈을 떼지 않고 밖을 응시하고 있다.

제주 국제공항에 도착해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한쪽 어깨는 나에게 의지해 걷던 어머니는 숨이 찬 지 쉬었다 가자고 한다. 수하물을 찾을 곳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서 좀 더 걸어야 한다. 몇 차례  숨을 고르고 수하물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돌아가는 것이 보이는 곳에 앉아있으라고 자리를 잡아주고 유모차를 찾으러 갔다. 어머니는 유모차를 받자마자 말을 탄 사람처럼 씩씩해 보인다. 짐을 다 찾은 우리는 먼저 도착한 누나와 조카가 기다리는 곳을 향해 서둘러 빠져 나간다.  


아침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하고 비행기를 탔는데 여전히 힘들다. 소리는 나오지만 힘이 없어 말소리가 되지 못한다. 언어를 얹히지 못하고 나오는 소리말이다. 전달할 목소리가 사라지면 표정이나 몸짓으로 대신하거나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나는 이 여행을 주도하고 싶었다. 엄마와 함께 떠나온 첫 번째 제주 여행이기 때문이기에 더욱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아내와 누나의 결정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미리 계획을 세워놓긴 했지만 계획은 날씨 예보와 같아서 당일에 바뀔 수 있으니까.


 어머니와의 여행은 모든 것이 만족이었다. 내게 찾아온 불청객 목감기 때문에 준비해 간 샴페인을 터뜨리지 못했고 엄마와 많은 얘기를 할 수없었던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갑자기 예약하고 탔던 요트와 몇 번을 오갔는지 모를 해안도로와 비 갠 아침의 바다. 엄마와 함께 먹은 호텔조식과 그곳에서 만난 귀엽던 꼬마아이. `좋아요`를 연발하며 우리의 긴장근육을 풀어서 사진을 찍어주던 내 사랑스러운 조카와 그 곁에 늘 붙어 다니며 언니의 파트너 역할을 한 우리 딸까지. 모든 것이 잘 맞았던 기분 좋은 여행이었다.

 좋은 여행의 기억은 적금처럼 쌓여서 행복이라는 이름의 추억으로 올 것이다. 어머니가 정정하다면 이 여행을 멈추고 싶지 않다. 더 많은 기억이 모아져 추억의 나무로 무럭무럭 자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내년에도 그 후에도 다른 곳으로 가는 첫 번째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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