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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순하고 하나였을 때

(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

by 장보구

시월이 끝나는 날에 베르가못 향이 나는 핸드크림과 고체 향수를 샀단다. 튜브에 들어있는 향수는 처음이라 낯설었지만 크림 바르듯 발라보니 향이 좋았다. 비 온 뒤 숲 속의 향을 품은 샌달우드, 장작냄새의 오크모스, 사향의 묵직함이 짙게 배어 나온 머스크, 유혹적인 투베로즈향까지. 향수에 들어있는 다양한 향이 궁금했지만 개별적으로 맡아볼 기회는 없어서 늘 후기를 읽으며 비교하곤 했었는데, 한 가지 향을 품은 제품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단다. 가을이 끝나기 전에 나에게 향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목서나무의 향 때문이었다. 출근길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면 살구향이 강하게 풍겨 와 몇 번을 두리번거리곤 했는데 그게 금목서의 향이더구나. 우리가 호주에서 출발하기 전에 들렀던 쇼핑센터에서 샀던 핸드크림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그땐 향을 잘 몰라 무얼 고를지도 몰랐지만 이젠 아빠 알아서 선택할 수 있어 좋단다. 아마 그때 샀던 핸드크림도 샌달우드와 허브꽃향의 조합이었던 것 같다. 요즘은 베르가못의 향이 좋단다.


시월을 보낸 나에게 향을 선물했다면 11월에는 휴식을 선물하기로 미리 계획을 세워뒀단다. 엄마와 함께 휴식할 곳으로 숲 속의 호텔을 예약해 뒀었지. 작년과 제 작년에도 휴양림에 가 쉬고 온 적이 있는데, 이번에 좀 더 고급진 곳에서 맘 편하게 쉬고 싶어서 호텔로 예약을 했단다. 그리고 그곳이 중부지역이고 부근에 북한강이 있어서 드라이브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우리가 사는 곳이 남쪽이다 보니 위쪽 산의 단풍이나 나무의 수종도 알고 싶고, 올라간 김에 엄마가 관심 있어하는 뜨개질의 성지(?)도 가보려고 맘먹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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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있게 집에서 커피를 뽑고 먼저 화성의 남양 성모성지를 향해 출발했지. 그곳은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지만 우린 마리오 보타의 건축물을 보려고 갔단다. 고속도로로 가는 도중 습관처럼 속도를 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 빨리 가서 뭐 할 건데? "하며 우리가 휴가중임을 알려 줬단다. 사실 우리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이번 여행도 통속적 시간에서 벗어나 우리의 시간을 갖고 느긋하고 자유롭게 움직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단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 사는 일은 속도와의 전쟁이란다. 모든 것이 편리함과 능률에 맞춰져 속도가 따라줘야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니 말이다. 도로에 나가면 더 심해지는데, 도로가 마치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처럼 움직이고 자동차가 부속품처럼 지나간다. 나 역시 도로에 올라서면 빼곡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다닌단다. 마치 여기서 낙오되면 운명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작용하는지. 그래서 우린 자동차도 한 대만 갖고 대중교통도 곧잘 이용하면서 속도전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는 않단다. 아마 옆좌석의 엄마가 환기시켜주지 않았다면 나도 모르게 질주본능에 빠져들었을 거다.


성당은 산의 중턱에 자리 잡아서 산책하듯 완만한 경사를 오르게 디자인된 코스였다. 억새가 피어서 하늘거리고 단풍은 곳곳이 물들고 산사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는 산책로에는 신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붉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서 제단처럼 만든 두 개의 원통형 구조물은 보는 이를 압도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없어 바깥에서 배회하며 사진을 몇 장 찍고 입구까지 툭 트인 전망을 내려다보다 잔디밭을 거닐었단다.


노란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지나자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준다. 입구에는 자작나무가 많아서 색다른 느낌이었다. 가로수로 식재된 자작나무가 하얀 수피로 길을 안내해 주었는데 커뮤니티 센터 앞쪽엔 오래된 수종이 섞여있어 더 볼만했단다. 조지 윈스턴의 `DECEMBER` 표지 재킷에 자작나무가 있는데 카드모양의 방 키고리에도 돋을새김 된 자작나무가 있더구나. 그래서 자작나무가 이곳의 심벌일 거란 생각도 들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 집에선 생각도 못한 일이지. 무슨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을 깊이 한 것 같기도 하고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감기기운이 남아있는 엄마의 기침소리도 간간이 들렸던 것 같다. 산 속이라 추울 것을 대비해 방안 온도를 높여놔서 실내는 반팔로 지내기에도 충분했다. 베란다가 있는 쪽의 커튼을 제치자 어둠이 창에 붙어 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싸늘한 느낌이 전해온다. 개나리와 작살나무가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갈참나무, 소나무가 집을 지키고 서있었는데 어둠 속이라 형태만 보인다.

우리는 새벽강을 보려고 했다. 북한강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정태춘의 노래를 들을 생각이었다. 북한강을 따라 올라갔지만 강은 쉽사리 본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강 주변은 상업용 건물이나 개인 별장으로 채워져 빼꼼한 곳이 없었다. 차량의 통행이 드물어서 초행이라도 편했지만 우리가 생각한 그런 강은 아니었다. `강뷰`를 강조하며 광고한 플래카드 문구를 보면서 이곳이 오래전부터 관광지였고 낭만과 유흥과 향락이 혼재된 곳임을 상기하자 조금 우울해졌고 숙소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청평호의 잔잔한 수면 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막 산을 넘어온 햇빛에 물안개는 기화되고 있었는데, 물빛에 반사되어 사라지면서 지난밤 꿈들도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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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식도 간단하게 먹었다. 요즘 우리는 간소한 식사를 지향한단다. 나이 들어가면서 소화력도 떨어져 적게 먹고 약간 배고픈 듯 지내는 게 편해졌단다. 가능하면 칼로리 높은 음식도 피한다. 그날 먹은 음식은 그날 소화하자는 생각으로 산단다. 이제 과잉이 불편하고 힘들다는 것을 안다고나 할까. 물론 다는 모르겠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모든 상황에 대비해 보려고 애쓴단다.


숙소에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쉬다가 산책을 하기로 했다.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나 밤나무종류가 대부분인 숲길은 떨어진 잎들로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우리는 나무의 수종을 살피면서 걸었고 덕분에 잣나무와 전나무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게 됐단다. 소나무는 우리가 사는 곳에서 흔하게 보이는 나무라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잣나무와 전나무는 처음에 쉽게 구분이 가지 않았다. 소나무처럼 뾰쪽한 이파리를 가진 잣나무는 이파리 5개가 퍼져 나오고 수피가 더 매끈했다. 전나무는 구상나무나 주목과 비슷한 이파리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날카롭더라. 수형이 곧고 멋지게 자란단다. 엄마는 오대산 전나무길을 다녀와서 전나무를 쉽게 알아보더구나.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흥미롭단다. 그리고 그걸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대화는 서로를 연결하는 창이란다. 어떤 사람과의 대화는 확장성을 가지지만 어떤 사람은 벽을 느끼기도 한단다. `자신과 얘기를 하는 듯한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것보다 더 행복한 관계가 어디 있겠는가.` 키케로가 했다는 이 말처럼 곁에 있어도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자신과 대화하듯` 일체감을 느끼게 해주는 엄마가 있어 좋구나.

점심때 고모부와 고모가 손녀를 데리고 왔더구나. 무척 기대된 첫 만남이었다. 어쩜 그리도 잘 섞어놨는지! 엄마 아빠를 반반씩 잘 닮았더라. 웃는 모습이랑 떼쓰는 표정이 무척 귀여운 애였다. 우리는 그 애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재롱을 다 부렸단다. 돌을 지났지만 아직은 잘 못 걷는 손녀를 보니 네 어릴 때가 생각나더라. 넌 일찍도 걸었단다. 돌이 채 되기도 전부터 발을 떼기 시작해서 돌 때는 곧잘 걸었단다. 엄마나 나는 우리에게 손자나 손녀가 생길 리 없다는 것을 안단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위축시키지 않고 다른 이의 자식 자랑이 특별히 부럽지도 않단다.

올해 오사카 공항에서의 첫 대면이 떠오른다. 케리어를 들고 우리는 너희들이 오길 기다렸지. 네가 먼저 오고 너의 짝이 약간의 시간차로 나타났을 때의 순간을. 약간 수줍어하던 그이를 데리고 우리 앞으로 왔을 때, 어색했지만 그 순간을 잘 넘겼단다. 그 낯섦과 어색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졌지만, 엄마가 " 딸이 두 명이 생겨서 더 좋은 거 같아. "라고 말할 때까지 내 시야는 그리 맑지 않았단다.


다음날 우리는 파주로 향했다. 고양을 지나 자유로라 불리는 도로를 지나갔는데 강변을 따라 반듯하게 뚫린 도로였다. 길가에 높게 자란 플라타너스가 단풍색으로 물들어 있고 주변의 풍경이 편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엄마가 찾던 ` 바늘 이야기 파주점` 에 도착했는데 실패에 감긴 색색의 실들이 다채롭고 질서 있게 정리되어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박물관에 들어선 기분이었고 인테리어도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이층의 카페에 앉아서 바라본 옥상의 푸른 잔디도 맘을 편하게 했는데 하늘을 향해 비워진 공간이 특히 맘에 들었단다. 허투루 버려지고 널브러지기 마련일 것 같은 실이나 실패가 종류별로 단정한 모습으로 구간을 채우고 있어 한참을 구경해야 했다. 신이 난 엄마는 장바구니에 실을 담느라 여념이 없었고 난 좌절감을 느껴야 했는데, 장바구니가 무거워 보인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예술의 질료`란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 색색의 실들을 얽고 짜서 만들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답답해졌다. 헤겔은`예술가는 자신의 정신을 질료라는 물질성에 담아낸 결과`라고 했는데 팔레트에 꽉 찬 물감처럼, 책장에 꽂힌 단어사전처럼 나를 압박했단다. 빈 도화지와 깜박이는 커서만 바라보고 앉아있는 나의 모습이 잠시 떠올랐기 때문이란다. 뜨개를 하는 것은 글을 쓰는 일과 많이 닮아있을 것 같았다. 단어를 새기듯 한 땀 한 땀 진행하는 일부터 완성품을 상상하는 것까지. 지웠다 쓰기를 반복하듯이 풀었다 짜기를 하면서 꾸준함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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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무료 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다행히 내비게이션에는 내비추천, 큰길우선, 무료도로, 고속도로우선과 같은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는데 늘` 빠른 길`로 검색만 해서 모르고 넘어갔더구나. 목적지를 향한 길에는 `빠른 길`과 `경치 좋은 길`이 있는데 그걸 기억해 내는데 평택까지 내려와서야 알았단다. 고속도로의 급박한 상황을 몸으로 느끼며 집에 도착한다면 우리가 보낸 멋진 휴가가 깡그리 뭉개지고 급하게 귀가한 기분만 남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따라간 무료도로는 알고 보니 오래전 고속도로더구나. 지금은 국도로 지위가 하락했지만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반가웠단다. 적당히 굽은 도로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며 이어졌는데 무엇보다 좋았던 건 차량 통행이 적은 점이었다. 우리가 원하던 바로 그런 드라이브였단다. 그리고 그곳엔 과거에 우리가 다녔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오르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오래전 네가 어렸던 시절에 함께 차를 타고 다녔던 때를 떠올리며 엄마와 옛 얘기를 하며 피곤한 줄도 모르고 내려왔단다. 우리가 잊고 있지만 어느 순간 어떤 향이, 어떤 사물이, 어떤 풍경이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표가 아닐까. 우리가 살아온 과거가 참 널리 펴져있는데 잊히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지만, 또 어떤 것이 잊힌 추억을 들춰낼지 궁금해하면서 차를 몰았다. 어둠은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왔지만 미래에 쌓아갈 추억을 생각하며 여유 있게 그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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