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나는 생일에 부모님께 선물을 받았던 기억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런 기억이 없다. (물론 부모님의 기억은 나와 다를 수도 있다. 내 기억은 과거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므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기억나는 건 매년 내 생일날 아침에 어머니께서 미역국을 끓여 주셨다는 사실이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단지 그뿐이었다. 부모님께 생일 선물로 무엇을 받았다느니, 이번 생일에 무슨 선물을 받고 싶다고 말할지 고민하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 그 말들이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하다는 믿음을 깔고 있어서, 그러나 동시에 우리 집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라서 기이했다. 너무나 기이해서 가끔은 이 감정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털어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래도 친구들의 생일은 챙겼던 것 같다. 친구들에게 생일 선물을 받았던 기억은 있다. 적은 용돈을 모으고 모아두었다가 친구의 생일에 맞춰 선물을 고르고, 친구가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살짝 부풀었다가, 이런 허접쓰레기 같은 걸 선물이라고 하다니 나에게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불안이 뒤섞였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선물을 건네고, 친구가 웃으면 마음속 어딘가를 쓸어내리며 함빡 웃었던 기억. 그러나 부모님에게서는 생일에 선물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 부모님이 엄청난 수전노라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강력하고 끈질긴 근거가 되었다.
생일을 축하받는다는 건 내 존재가 세상에 등장한 일이 누군가에게 환영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받는 하나의 의식이다. 지금은 생일에 그런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게 되었지만 어렸을 때는 그것이 무척 중요했다. 그래서 그 의식의 화려함, 풍요로운 느낌, 약간 과시적으로 되는 그 느낌을 막연하게 동경했다. 더 비싼 선물, 더 많은 선물, 더 많은 축하를 받을수록, 더 화려하게 축하받을수록 내 존재가 그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부모님이 경멸하는 삶의 태도였다. 나는 부모님에게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물질적인 것을 대놓고 욕망하는 일은 속물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이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배웠다. 동시에 물질적인 것을 너무 흥청망청 낭비해서도 절대 안 되었다. 부모님에게 돈은 꼭 필요한 곳에만, 그것도 아낄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아껴서 사용해야 하는 거였다. 돈에 집착하면 안 되었지만 돈을 아껴 쓰는 데에는 엄청나게 집착하는 것. 이 양가적인 가르침을 그때 나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했다. 우리 집이 다른 집보다 가난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그런데 가난을 어렸을 때부터 내 정체성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막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40년 가까이 대학교수였고 우리 어머니는 같은 기간 내내 전업주부였다. 대학교수라는 직업에 부여된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은 충분히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것이었기에 내 아버지의 직업을 들으면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버지의 차는 아주 오랫동안 중고 스타렉스였으며(왜 중고 스타렉스여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사연이 있으나 그건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그다음에는 은색 모닝이었으니까. 동료 교수들 중에서 내 아버지와 같거나 비슷한 등급의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경제관에 치를 떨었으면서도 오랜 세월 함께 살아가는 부부들이 으레 그렇듯 놀랍도록 비슷해졌다. 어머니의 경우는 그것이 차가 아니라 시장에서 노점 상인들에게 억척스러움을 최대한 발휘하여 최저가로 가격 흥정하기, 음식을 남기는 건 아까운 일이니까 아무리 배가 부를지언정 버리지 않고 모조리 먹어 치우기 등으로 나타나는 양상이 달랐을 뿐이다.
나는 가족들끼리 차를 타고 어딘가 갈 때마다 좁아터진 모닝 뒷좌석에 두 동생들과 셋이서 비좁게 끼어서 앉아야 하는 게 싫었고 개량 한복 두어 벌을 거의 일 년 내내 돌려가며 입는 아버지도 싫었고 시장에서 노점 상인과 흥정하느라 억척스러움의 끝을 보려는 어머니도 싫었다. 어머니가 흥정하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고 서 있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늘 나를 시장에 끌고 가려고 하는 것도 싫었다. 흥정에 성공하고 나면 꼭 새로이 자랑스러운 업적 하나를 남긴 사람처럼 나를 돌아보면서 ‘봤지? 흥정이란 이렇게 하는 거야. 너도 미래에 나처럼 시장 길바닥에서 상인들을 상대로 이렇게 해야 나처럼 위대한 흥정가이자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는 알뜰한 주부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는 거라고.’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어머니가 싫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웠다.
새 차 하나 사는 일이 이렇게까지 오래된 과거들을 헤집어야만 하는 일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나라는 인간이 이렇다. 한 번 어떤 생각에서 의구심이 똬리를 틀기 시작하면 그것의 원천을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라서 그렇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생겨 먹었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아직 2013년형 하늘색 스파크를 아주 멀쩡하게 잘 타고 다니고 있고, 내 차에 불만 같은 건 거의 없다. 불만은커녕 가능한 한 이 차와 오래 함께하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매우 만족스럽게 타고 다닌다. 요리조리 좁은 틈에다 주차하기 편하고, 경차라서 주차요금도 고속도로 통행료도 심지어 반값이라는 점은 큰 매력 포인트다. 조금 큰 짐을 실어야 할 때 난처하다는 점이 불만이라면 불만인데, 그럴 일은 거의 없고 그럴 때는 남편의 큰 차를 이용하면 되니까 이걸 불만이라고 말하기도 좀 부끄럽다.
내가 이 차를 사게 된 건 순전히 자주색 중고 라노스가 운명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는 새 차를 갖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안 했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이 타고 다니던 새 차들이 막연하게 좋아 보인다고는 생각했지만, 나도 저런 새 차를 갖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라노스를 타고 출근하던 길에 갑자기 차가 엑셀을 계속 밟고 있는데도 점점 더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고,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사이드미러를 보면서 비상등을 켜고 갓길로 차를 빼냈다. 보험사에 전화해서 긴급출동 서비스를 불렀다. 차는 견인차가 와서 정비소로 끌고 갔고, 나는 택시를 타고 직장에 출근했다. 정비소에서 차 수리 비용으로 100만 원 정도가 든다는 말을 듣고, 아, 이제는 이 차를 보내주어야 할 때가 되었구나, 직감했다. 알다시피 나는 이 차를 90만 원에 샀다. 수리비가 100만 원이라니. 이걸 수리한다는 건 웃기는 일일 터였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