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동생 결혼식에서였다. 수년 만에 만난 친척 어른들은 마치 어디에서 단체로 주입식 교육이라도 받은 것처럼 똑같은 말을 했다.
“살쪘네.”
체중계 없이 산지가 몇 년째인지도 가물가물한데, 하루 단 몇 시간 동안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내 몸에 대해 한 목소리로 살쪘다고 평하니 나도 모르게 체중계 위에 내 몸을 올려놓는 상상을 했다. 몇 킬로쯤 나가려나? 요즘 좀 많이 먹긴 했는데. 몸무게를 재지 않은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감이 떨어졌지만 좀 찐 것 같긴 하다. 몇 년 만에 만났으니 내 몸을 매일 쳐다보는 나보다는 그들이 내 체중 증가를 더 확연히 체감했을 터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나는 지난 수년 간 꾸준히 살이 쪘다.
그 말은 사실 여부를 떠나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몸매 관리는 커녕 운동조차 하지 않고 화장은 커녕 스킨-로션-썬크림도 바르지 않는 쌩얼을 몇 년째 고수하는 내 생활 양식에 대해서. 체중계에 주기적으로 올라가기는커녕 아예 체중계라는 물건 자체가 없는—체중계와 함께 체중을 측정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삭제해버린—삶에 대해서. 반대로 “살쪘네.” 같은 말을 듣지 않으려면 내가 마땅히 투자해야 했을 시간과 비용, 노력에 대해서.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과식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을 꾸준히 하고 매일 아침 한 시간씩 더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매만지고 ‘유행’을 따르면서도 내 몸매의 단점은 커버하고 장점은 부각해줄 옷을 주기적으로 사서 입고 조금 발이 불편하더라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구두를 사 신는 것 등등…
이 목록을 전부 헤아리자면 끝이 없으니 여기까지만 쓰련다. 이런 노력들을 다 하는 것이 내게는 불가능하게 느껴지는데, 다 한다고 해서 내가 이 분야(외모 가꾸기)에서 완전히 ‘성공’을 거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도대체 이 분야에서의 ‘성공’이란 무엇일까? 이 분야와 관련한 수많은 노력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것일까?) 만일 그런 노력이 ‘성공’한다면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이를 테면 내가 동생 결혼식에서 친척 어른들에게 살쪘다는 말 대신 들을 수 있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긴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안다. 내 주변에 이러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인 결과로 모종의 성취를 이룬 듯이 보이는 기혼 유자녀 여성들은 이런 말을 자주 들으니까.
“더 의심받아라,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다면.”
당신도 이 글을 읽으면서 이미 그 말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호들갑을 떨며 “‘애엄마’ 같지가 않네. ‘아가씨’ 같아.”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아가씨’라는 말은 ‘젊어보이는’ 미혼 여성 전반을 지칭하는 말인 동시에 성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을 일상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기도 해서 더욱 문제적인데, 이 단어가 “‘애엄마’ 같지 않다”라는 말과 함께 애엄마의 외모 칭찬에 동원된다는 사실 또한 문제다. 우리 사회가 성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고 취급해왔는지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여기에서 쓰인 ‘아가씨’라는 말을 ‘젊어보이는’ 미혼 여성이라는 의미로만 한정해 생각해본다고 해도, ‘애엄마’ 같지 않은 외모가 ‘아가씨’ 같은 외모라면, 이 말은 결국 ‘애엄마’와 ‘아가씨’ 양쪽 모두에게 서로 다른 압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애엄마’에게는 ‘아가씨’처럼 되기를, ‘아가씨’에게는 ‘애엄마’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탁월한 외모를 갖추기를 기대하고 강요하는 압력으로 말이다.
게다가 애엄마의 외모를 두고 “애엄마 같지 않다”고 평가하는 말이 최고의 찬사가 되는 현실은 애엄마들을 이중으로 구속하는 셈이다. 검색 포털에 ‘애엄마’를 검색해보면 가장 먼저 뜨는 것은 늘씬한 S라인 몸매를 과시하는 여성 연예인 기사 이미지다. 기사의 제목에는 대체로 “애엄마 맞아?”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애를 낳았음에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미모와 몸매 라인을 갖춘 여성 연예인에게 붙는 최고의 찬사는 그가 애엄마 같지 않음을 강조함으로써 완성된다. 애엄마인 게 의심된다는 말, 다시 말해 “애엄마 같지 않다”는 말이 애엄마에게 칭찬이 되는 현실은 ‘애엄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생성하고 강화한다.
여기서 잠깐, 도대체 ‘애엄마’란 무엇인가. 단순히 ‘애를 낳은 엄마’라는 표면적 정의를 넘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애엄마'의 이미지는 어떤 이미지인가. 어제 입었던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오늘도 내일도 입는 사람, 제때 씻지 못해서 떡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질끈 묶고, 화장기 하나도 없는 얼굴에는 누적된 피로가 만들어낸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사람, 펑퍼짐한 뱃살과 옆구리살을 감추기 위해 어두운 색깔의 헐렁한 옷을 주로 입는 사람, 여성스러움과는 한참 멀어져버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 뭐 그런 걸까?
애엄마 연예인들에게 보내는 “애엄마 맞아?” 같은 칭송의 말들이 애엄마들을 포함해 사회 전반에 애엄마를 더욱 멸시하도록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런 말은 애엄마 자신에게 특히 해롭다. 애엄마에 대한 사회적 혐오(‘맘충’ 담론)를 양산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애엄마이면서 애엄마 같아 보이지 않아야 하는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면 먼저 자신이 벗어나려고 하는 그 애엄마의 이미지를 혐오해야 한다.
이런 감정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애엄마는 자신의 처지를 한없이 비관하거나, 바로 그와 같은 비관에 빠지지 않기 위해(애엄마 같아 보이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다. 그 결과 돌아오는 보상은 “애엄마 같지 않다”는 주변인들의 반응이며, 그것이 그를 흡족하게 만들어줄 테지만 영예로운 순간은 짧다. 그 순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간에 그는 끊임없이 자신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외모를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를 의심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봐 불안할 수밖에 없다. 더 의심받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면, 과연 그 노력이 애엄마 자신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심지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이러한 압박을 일상적으로 달고 사는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아예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런 문제에 관해 여자들보다 더 사려깊거나 신중해서라기 보다는 그들 대부분은 여성들의 꾸밈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 중 일부는 젊은 미혼 여성의 외적 매력에 매혹될 뿐이지, 그것들이 어떤 노력과 과정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또한 그들은 ‘애아빠’로서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줄임말)을 거의 듣지도 않는다.
**성 노동자는 우리 사회에 ‘있지만 없는’ 사람이다. 그들의 노동은 종종 (주로) 남성들의 성욕 해소용으로서 ‘필요악’이라며 두둔되지만 그렇게 대변하는 사회적 필요성에 비해 그들에 대한 인식은 처참하다. 그들이 자신의 노동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해도 그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성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일상적으로 그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유구한 인류 역사상 그들은 “창녀”라는 말로 불렸다. 그 말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혐오스러운 이미지와 이야기들이 그들을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수용하지 못하게 만든다.
***애엄마는 상황에 따라 애엄마처럼 보여야 하거나 애엄마 같지 않게 보여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어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애엄마는 필연적으로 “애엄마 같지 않다"는 말로 칭찬 혹은 비난받거나, “애엄마 같다"는 말로 멸시 혹은 동정의 대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