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몰라요
지난여름 회사에서 짤리고 한동안 넋을 놓고 살았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짜른 그 회사에서 한 달 정도 쉬고 다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솔직히 반가웠다. 그래도 다시 오라는 걸 보면 내가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구나, 뭐 그런 안도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그렇게 가차 없이 나를 짜른 회사에, 다시 가는 게 맞나?
10년 차가 넘고 내가 원하는 일자리를 선택할 기회 자체가 거의 없었다. 애초에 나 정도의 연차가 지원할 수 있는 자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방송은 인맥이라는데 왜 좀 더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나,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아마 똑같이 살겠지.
그래서 기회가 오면 무조건 잡아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나는 나를 짜른 회사에 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계약직 공무원이 됐다. 지난했던 과정을 다섯 글자로 줄이면 '운이 좋았다' 정도가 되겠다.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지만 다정한 동료들의 도움으로 상상도 못 했던 공무원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 아직은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데 출퇴근 시간이 규칙적인 게 가장 좋다. 업무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작고 소중한 연차가 있는 것도 너무 신기하다. 연차라니, 아아, 나한테 연차가 생기다니.
다만 13년을 프리랜서로 살았으니 하루아침에 계약직 공무원이 됐다고 해서 어떤 소속감 같은 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큰 이변이 없는 한 1년 안에 이곳을 나가게 될 텐데 그땐 또 어디로 가야 할까. 잠시나마 소속될 기회를 잡았음에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게 씁쓸하기도 하고 나와 다른 동료들이 신기하고 부럽기도 하다.
요즘 자주 되새기는 말이 있다. 몇 년 전 '빨간 안경'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와서 한 얘기다.
Q. 지금까지 나의 삶을 한 줄 평으로 쓴다면?
A. 이건 자주 생각하는 거라서요.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어차피 인생 전체는 목적을 가지고 전력투구를 해도 안 된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됐고요. 인간이 그나마 노력을 기울여서 할 수 있는 건 오늘 하루 성실한 것, 그거는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나머지는 제가 알 수 없죠.
어제는 처음 혼자 야근을 했다. 저녁으로 국밥을 한 그릇 먹고 소화도 할 겸 사무실 근처를 몇 바퀴 걸었다. 깜깜한 하늘 아래 곱게 물든 단풍을 보며 이 가을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었는데 술을 먹지도, 손을 떨지도 않고 아주 기가 막힌 장면을 담았다.
어차피 알 수 없는 인생, 하루하루 성실하게, 기왕이면 즐겁게, 씩씩하게 살아보기로 오늘도 다짐한다.
사진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8XKBduGyY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