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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냇물 Jan 02. 2024

행주산성에 무슨 일이 있었나?

자유로를 이용해 서울을 벗어나면 곧 행주산성을 스쳐 지나간! 이 산성은 역사유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리 발길이 많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새해 첫날 그곳에서 어떤 정치단체의 왁자지껄한 산행이 있었다.  

    

지난 정권 총리를 지내셨던 분이 소속했던 당과 결별 후 새로운 정치결사체를 만들기 위한 출정식 성격의 행사로 보인다.   

명분이 중요한 정치인들은 의미 있는 정치선언이나 활동을 위해 국립묘지를 찾거나, 백범기념관 등 유서 깊은 곳에서 정치적 선언이나 활동을 개시하는 건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아마 이번 산행도 자신들이 누란에 처했던 임진년에 이곳에서 권율장군을 중심으로 전장병이 혈투 끝에 왜적을 물리친 행주산성 전투의 정기를 이어받거나 결연한 모습으로 비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럴싸하게 보이는 정치 이벤트로 보인다만 나로선 그것엔 큰 관심이 없고, 평생 직업군인으로 봉직했고 그곳 유적지를 여러 번 다녀오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던 점에 대한 의견을 제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행주산성 전투는 임란 2년차인 1593212일 권율이 지휘했던 조선군이 산성으로 공격하는 왜군 3만 명의 집요한 공격(9)을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막아내며 승리하였다는 전투다.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 대첩으로 불리며, 여자들까지도 그산성치마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 전투를 도와 행주치마가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내가 갖는 문제의식은 이 전투가 대규모 병력이 격전을 치르고 승리했었는 지이다. 지형양상이나 전투기간 등 상황을 고려했을 때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전투는 15924월 왜군이 침공 후 거의 1년 정도 된 때다. 조선반도가 그들의 장악하에 들었다가 명나라가 참전한 뒤 평양성 전투에서 왜군이 패하고 후퇴하다가 벽제관 전투에선 명군을 패퇴시킨 상황이나 수세적 상황이다.     


그들은 서울로 군을 집결시키며 조명연합군의 공세에 대응하며 철군을 고려하는 상황이었다. 즉 이곳에서 결전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전투를 하루 밖에 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를 간접으로 증명한다. 저녁 5~6시경 종료.     


한편 행주산성이 위치한 덕양산은 한강을 끼고 형성된 낮은 고지(125m)로 면적이 0.8 km²에 불과한 작은 공간이었다. 조선군은 2,300명 규모로 서울탈환을 위한 공세 병력으로 방어상태는 견고하다 할 수는 없다.

     

3만 명이란 큰 규모의 왜군이 전개하여 작전을 수행하기는 전투지역이 너무 협소하고, 왜군의 사상자가 130여 명에 대첩이란 칭호가 붙는 것도 어색하다.    


왜군은 서울방어 및 철수대비를 위한 주변의 조선군 상황파악을 위한 일종의 위력수색 작전으로 보인다(1일간의 짧은 전투, 결전을 안 하고 자발적 철수)      


*** 위력수색 : 적의 배치, 강도, 약점을 알아보기 위해 제한된 지역에서 실시하는 수색작전


좀 황당한 나의 상상은 조선군의 승리가 필요해서 과장된 전과에 의한 승리  아닌지 모르겠다.


전쟁이 오래되어 국민들이 피곤해 선무차원의 승리가 필요했고, 권율장군이 그 당시 실세인 영의정 유성룡과 가까운 사이란 점도 그렇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기에..’란 말을 옹호하기 위한 글도 아니다. 다만 군사학을 배웠고 평생을 육군의 전투병과 장교로서 복무했던 사람으로서 그곳에서 3만 명이 동원된 하루짜리 전투를 도대체 상상할 수 없기에 좀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후손들이 행주산성을 다녀올 때 공감하도록 관심 있는 전문가들의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 이 전투 때문에 행주치마란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도 근거가 없다고 밝혀졌다.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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