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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Nov 08. 2020

나를 비우는 오후 4시 산책

episode #13

오후 4시.
오늘도 운동화를 신고 집 앞 공원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살짝살짝 비추는 햇살에 눈이 찌푸려지기도 하지만, 비타민 D를 공짜로 선물 받는다는 생각으로 햇살을 감사히 맞이한다.

사람들은 공원 둘레를 따라 나 있는 보도를 주로 러닝 트랙 삼아 뛰고 걷는다. 도로와 맞닿아 매연과 소음이 있지만,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와 빌딩 사이에 자리한 푸른 녹지가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하는 공간이다. 나는 이 공원 둘레길을 걷는다.

이 시간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신체적으로는 운동하는 시간이고, 정신적으로는 생각하는 시간. 영적으로는 성찰하는 나만의 힐링 시간이다. 나는 이 오후 4시 산책을 '나를 비우는 시간'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요즘 <<신박한 정리>>라는 집 정리 프로그램이 인기라던데, 집 만 정리할 게 아니다. 나 자신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넘치는 지방을 덜어내고, 흐트러진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찌꺼기도 정화하는 시간. 오후 4시 산책이다.




걸으면 피가 제대로 도는 게 느껴진다. 집안이 추운 것도 아닌데, 책상에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점점 손발이 시려오고, 반대로 머리는 뜨거워진다. 옛 어른들이 '머리는 차갑게, 발은 따뜻하게' 하라셨는데, 이와는 완전히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걷기 시작하면 5~10분 만에 손발이 따뜻해진다. 걸을수록 피가 제대로 돌고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또 반복적인 움직임은 뇌를 깨우는 효과를 준다. 평소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단순 반복적인 행동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잔 생각들이 떠오른다. 걷기가 그렇다. 계속 한 방향으로 걷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팔다리의 반복적 움직임이 뇌로 가는 혈류의 순환을 가져온다고나 할까. 걸으면서 할 일의 우선순위가 정리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떠오른다. 매일 정확히 3시 30분에 산책을 해서 동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시간을 헤아릴 정도였다는 철학자 칸트의 일화만 보아도 단조로운 걷기가 얼마나 깊은 사유에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다.



'4시 산책'의 핵심은 단조로움과 반복에 있다. 꼭 오후 4시가 아니어도 되고, 공원이 아니어도 되고, 걷기가 아니어도 된다. 그저 단순한 어떤 행동을 일정 간격을 두고 반복하는 것이 포인트다.

집단상담에 참여했을 때, 추천받은 것 중 '마음 챙김 호흡'이란 것이 있었다. 천천히 호흡을 관찰하는 호흡법이다. 호흡을 통해 산만하게 흐트러진 주의를 부드럽게 돌리는 것이다. 매일 하고 점차 시간을 늘려나가라고 했다. 이 방법을 통해 난임으로 인한 어그러진 마음 다스리기를 추천받았다.

사실 마음 챙김은 '기도'와 거의 유사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둘 다 눈을 감고, 조용히 내면을 살피는 것이다. 다만 분명하고도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 챙김은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것이고, 기도는 자기 자신 대신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기도는 나를 비우고 내가 주인 됨을 내려놓고, 주님이 나의 창조주임을, 주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마음 챙김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방법이라면, 기도는 나의 정체성의 본질을 꿰뚫어 오히려 깊은 상처를 끄집어내 잘라내는 근본적 치유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비우는 행동의 선택지는 많다. 누군가는 마음 챙김을, 누군가는 명상을, 누군가는 요가를, 누군가는 국선도를, 누군가는 기도를 선택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청소를, 어떤 이는 옷 정리를, 어떤 이는 사우나를 택할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은 산책과 기도다. 정확히 말하자면,
QT(Quiet Time)와 성경통독, 일기, 기도 등으로 이루어진 모닝 영성 루틴과 오후 4시 걷기이다. 모닝 루틴은 이제 막 127일을 넘어섰고, 4시 산책은 갓 한 달을 넘지 못했다. 평일 기준 매일 하는 것인데, 사실 백 퍼센트 지키기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면 안 된다. 주기적인 루틴이 되어야 반복성이 생기고, 그 시간이 되면 저절로 생각이 비워지고 정리될 준비를 하게 된다. 한 번 두 번 못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이어서 시작하면 된다.





'4시 산책'의 시간. 난임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일단 걷기는 난임의 기본 수칙이다. 혈액순환이 관건이기 때문. 또 오후 2시 따가운 햇볕보다 살짝 누그러진 햇살을 통해 천연 비타민D를 공급받고, 밤 숙면을 위한 멜라토닌을 얻는다.

그리고 걸으면서 복잡하게 얽힌 생각의 실타래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그동안의 나를 반성하기도 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비워낸다. 공난포가 나왔던 날의 허탈함, 조기 배란의 슬픔, 수정 실패의 속상함, 이식 실패의 좌절감과 유모차 부대가 선사하는 소외감과 질투의 감정, 남편의 관심마저 시조카에게 빼앗겼을 때 느끼는 외로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정적 감정을 하나씩 덜어낸다. 걷다가 울기도 하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신나게 욕하기도 하고 깔깔대며 웃기도 한다.

계절이 바뀌면서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바람도 한결 차갑다.
오후 4시가 아니라도, 산책이 아니라도 대안은 많다. 하루 한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정리하고, 비워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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