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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Sep 07. 2020

불안 친구, 이제는 안녕.

episode #06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실존적 불안이 있다고 한다. 실존적 불안(‘angst')은 비존재 즉, 존재하지 못함에 대한 불안이다. 쉽게 말하면 홀로 됨이나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인간에게 '혼자된다는 것'이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홀로 태어나며 죽을 때도 혼자 죽는다. 궁극적으로 혼자인 인생이며, 죽음에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느끼는 불안은 어쩌면 누구나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난임을 인지한 후 처음 들었던 감정은 실존적 불안과는 또 다른 차원의 '불안'이었다. 단순히 자녀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넘어 곧 폐경이 되어 시험관 시술을 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당장 한 달 뒤 폐경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나를 강하게 짓눌렀다.


당장 시험관 시술을 해야 했다.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1차 시험관 시술에 들어갔다. 하지만 고용량의 과배란 주사*에도 난소는 끄떡도 하지 않았고, 자연주기*로 돌리고도 한참 뒤에서야 난포 하나가 겨우 보였다. 난자 채취까지 이르렀으나 결과는 공난포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이게 만만한 게 아니구나..."

남들은 착상이 문제라던데, 나는 채취부터 난관이었다.

더 조급해졌다. 착상은커녕 이식이나 해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현실은 공포 그 자체였다.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시험관 시술을 두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입사한 지 1년도 안 되는, 걸어서 10분 거리 고연봉의 꿀 직장에 사표를 냈다. 난소기능저하는 자주 진료를 봐야 하는데, 갓 입사한 나는 주어진 휴가도 부족해 주변 눈치가 이만저만 아니었기 때문이다. 식단과 생활습관을 바꾸고, 각종 영양제를 사들였다. 온라인 난임 카페에 가입해서 성공 후기를 읽고,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난소기능저하 케이스를 많이 다룬다는 병원과 의사를 알아내어 다시 시험관 시술에 들어갔다.


급하게 달리려는 나를 막아 세운 것은 '준비하며 기다리자'는 남편의 말이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몸을 준비할 시간을 갖자고 했다. 당장 폐경이 걱정되었지만, 기도하며 준비해보기로 했다. 그때 한약을 3개월간 먹으면서 신기하게도 불규칙했던 생리주기가 딱 28일로 맞춰졌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니 불안은 금세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어진 채취 실패, 이식 실패는 다시 나를 불안하게 했다. 채취 날 시술의자에 올라갈 때마다 혹시 조기 배란되지 않았을까, 채취하고 나면 공난포나 기형 난자가 나온 것은 아닐까, 채취 후 다음날에는 수정 실패나 기형 배아가 돼서 배아를 폐기해야 한다는 전화가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극도의 불안은 뭐니 뭐니 해도 배아 이식 시기에 경험하게 된다. 배아를 이식하고 며칠은 설레며 기분 좋게 지내지만, 성공 후기에 적힌 증상들이 안 나타나거나, 증상들이 생겼다 없어지면 그때부터 피검사*하는 날(이식 후 대략 12일째)까지 계속 불안 속에 산다. 무엇을 먹어도, 안 먹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안 해도 불안하다. 누군가는 되도록 누워있어야 한다 하고, 누군가는 누워만 있지 말고 오히려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전복, 추어탕, 소고기, 포도즙을 꼭 먹으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스턴트 등 아무거나 먹었는데도 착상에 성공했다 말한다. 그러다 피검사 결과가 꽝으로 판정 나면, 내가 뭘 잘못했지, 너무 누워만 있었나, 너무 돌아다녔나, 덜컹거리는 그 버스 괜히 탔나, 그 영양제 때문인가, 화장실에서 너무 힘줘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실패의 원인을 나의 행동에서 찾으면서 죄책감을 키운다.




불안, 두려움, 걱정, 염려는 난임을 알게 된 후 줄곧 나와 함께하는 친구였다. 하지만 시술 고차수가 되면서 어느 순간 불안 속에서도 의연함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난임 기간이 길어지고, 온갖 예측불허의 이벤트를 겪다 보니 여유로움이 생긴 것이다. 다음 상황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할 때는 불안이 가득했지만, 이제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니 맞아도 덜 아픈 것 같다. 


난임계의 '난임 지식 지존'이라 불릴만한 분, 닉네임 '꼴통주부'님이 강조하는 것이 있다.

 무심(無心)한 태도로 난임 과정에 임하면 언젠가는 꼭 엄마가 된다


꼴통주부님은 스트레스에 무덤덤하고 예민하지 않은 태도를 가지고, 긍정 모드를 넘은 낙천 모드로 생활할 때 생식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하였다. 강박관념을 갖고 임신에 집착하게 되면 뇌의 시상하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시상하부-뇌하수체-난소로 연결되는 유기적인 과정이 오히려 어그러져버린다고 했다.


꼴통주부님의 조언대로 불안과 걱정은 난임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 자신과 가족만 힘들게 할 뿐이다. 문제는 그 '무심'이 마음처럼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난임 과정이란 것이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드는 일이다 보니 아무런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불안이라는 친구와 이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난임 불안'은 다음 상황을 예측할 수 없어서라기 보다는 다음 상황이 '내가 원하는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생기는 불안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내가 이미 정해놓은 그 목표, 그 시기, 그 방법대로 안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불안을 만들고 키운다.


답은 쉽다. '내가 원하는 뜻'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 나이 먹고 세상을 살며 깨달은 중요한 한 가지는 '세상 모든 사람이 내 맘 같지 않고, 세상 모든 일이 다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뜻'을 내려놓고, 최대한 이 과정을 무심하게, 무던하게, 기분 좋게 보낸다면 엄마가 되는 길이 조금은 편하고 워지지 않을까.





*과배란 주사: 매달 1개의 우성 난자가 배란되기 위해 배란 약 14일 전(생리 시기)부터 여러 개의 난포가 자라게 되는데,  이 여러 개의 난포들이 모두 자라도록 하는 호르몬 주사.

*자연주기 요법: 과배란 주사 없이 자연 배란에 따라 난자를 채취하는 방법.

*임신 반응 피검사: 혈중 beta hCG(human chorionic gonadotropin) 수치로 임신 여부 판단. 보통 이식 후 10~12일째에 10 이상이면 임신으로 판단하며, 100 이상 나오면 안정권으로 봄. 피검사 이틀 후 1.66배 이상 오르면 정상이고, 그 미만일 경우 자궁외 임신이나 화학적 유산 가능성이 있어 피검사를 통해 지속 경과 관찰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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