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비 Sep 09. 2020

관계가 달라진다. 의도치 않게

episode #07

나는 원래 아이를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유아기 아이를 보면 환장했다. 'god의 육아일기'가 방영되던 시절에는 재민이에게 폭 빠졌었고, '아빠 어디 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때에는 윤후와 추사랑을 보는 낙으로 살았다. 길을 가다 아기를 보면 손을 흔들어줬고, 말을 걸었다. 지인이 출산을 하면 아기 옷을 사들고 꼭 집으로 찾아가 아이부터 안았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난임 전 얘기다. 시험관 시술을 시작하고부터 시청하는 TV 프로그램도 달라졌고, 만나는 사람도 바뀌었다.



처음에 나의 난임 진단을 믿기 어려워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병원을 찾아 다시 검사를 요청했었다. 그 병원은 난임 병원이기는 하지만 산부인과도 같이 병행하고 있는 중형급 병원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많았다. 예약을 하고 가도 기다려야 했다. 사실 기다리는 것이나 거리가 먼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임산부들이 많다는 데 있었다. 마치 임산부 시장 같았다. 그들은 나와는 표정부터가 달랐다. 진료실에 들어가고 나올 때 다들 설레고 기쁜 표정이었다. 그들 속에 있으면 나는 괜스레 위축되었다. 나만 루저 같았다. 시술 때마다 손을 잡고 기도해주신다는 유명한 의사 선생님이 계셔서 그 병원을 일부러 찾아갔던 것인데, 5분 만나는 의사보다 기다리는 한두 시간 동안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임산부들 때문에 검사 결과만 듣고, 다시는 그 병원을 가지 않았다.


이런 '루저 의식'은 평상시 다니던 길을 두고 멀리멀리 돌아서 가게 만들었다. 집에서 지하철역으로 이어진 직진 코스여서 자주 오고 가던 그 길에는 유난히 임산부나 어린 꼬맹이들이 많았다. 작은 평수의 아파트 단지와 맞닿은 길이어서 그런 듯했다. 난임 초기, 그 길을 지날 때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두리번대다 결국 시선을 땅바닥에 두게 되었다.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세계에 사는 그들에 대한 부러움과 나 자신에 대한 초라함은 시선회피로 이어졌다. 임산부나 아기, 아니 유모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간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다행히(?) 내 또래의 친구들은 아직 결혼을 안 했거나 아니면 벌써 아이가 초등학생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또래 친구관계와의 변화는 딱히 없었다. 오히려 또래 친구들과는 직업, 거주지, 취미 등 서로 삶의 방향이 달라도 서로의 다름에서 의미를 찾아가며 더 돈독해졌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친한 어린 동생들과의 관계는 그들의 결혼을 기점으로 서서히 정리가 되었다. 나의 난임 상황을 아는 그들이 임신을 하게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연락을 끊었다. 서로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없었다. 서로의 관심사가 달라지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안부가 궁금하면 카톡 프로필이나 SNS를 보면 될 일이었다.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나에겐 직장 공동체가 사라졌고, 취미 공동체도 없어서 나에게 남은 공동체는 교회뿐이었다. 교회의 여성 모임은 내가 유일하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공동체였다. 하지만 나를 제외하고 모두 자녀가 있는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어 반쪽의 공감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남편조차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나를 온전히 공감해 줄 있는 사람은 같은 난임을 경험하고 있는 여자 사람밖에 없다고 느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동네 친한 동생도 난임이라 했다. 원래도 친한 편이었지만, 우리는 시험관 시술에 대한 이야기로 공감대를 형성하며 더 끈끈해졌다. 서로의 병원 진료 과정을 공유했고, 정보를 교환했으며, 부부끼리 동반 데이트를 하며 감정을 다독였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처럼, 그녀의 시험관 시술이 성공하면서 우리의 관계는 또다시 재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한 번씩 했던 통화는 일주일에 한 번, 2주일에 한번,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들었고, 통화를 하더라도 그녀는 내가 일부러 임신에 대해, 육아에 대해 묻지 않는 이상 일부러 꺼내어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배려였다. 그녀가 임신하고, 출산할 때까지 우리는 딱 한번 만났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인간관계의 변화를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전학이나 이사로 인해 친했던 친구와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게 되는 것이 무척 속상했다. 대학에 진학하고, 취업을 하면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형성될 때마다 이 관계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공동의 목표가 사라지면 관계의 느슨해짐을 거쳐 종국엔 끊어지고 마는 경험을 통해 관계의 허무함을 느꼈다.


난임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나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가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변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짊어진 '난임'이라는 두 글자의 정체성이 관계 네트워크를 바꾸어버렸다. 지금 나의 관계 네트워크는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특별한 공동의 목적과 관심사를 통해 관계가 새로 형성되거나 지속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그저 사람이 좋아서 특별한 용건 없이도 만남을 지속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만남의 분명한 목적과 동기가 있기에 서로의 개인사를 대화의 주제를 삼지 않아 불편해질 일이 없고, 후자의 경우는 "좋은 소식 없냐"는 가벼운 안부의 말조차도 입 안에 머금고 내 눈빛부터 살필 줄 아는 사람들만으로 구성되기에 부담 없고 솔직한 대화가 가능하다.


시간이 지나고 난임 프레임이 사라지는 그 시점을 기다린다. 출산 여부와 관계없이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시점이 되면, 유모차를 봐도 눈가가 촉촉해지지 않는 단계가 되면, '내 아이' 말고 그냥 '모든 아이'들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마음이 되면, 끊어졌던 모든 관계도 자연스럽게 회복될 거라 믿는다. 아마도 그때쯤이면 또 다른 정체성을 통해 새로운 관계망이 형성되어 가지를 치고 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불안 친구, 이제는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