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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Sep 12. 2020

내가 모르던 세계, 몰라도 됐던 세계

episode #08

처음 난임 카페를 기웃거리게 된 것은 단순히 난임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온라인 속 난임 여성들이 모여있는 그 카페는 꽤나 룰이 엄격했다. 실제로 처음 가입 시 나는 '가입 거절' 통보를 받았다. 다른 여느 카페들에 가입할 때처럼 질문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단답형으로 간단히 답했던 것이 문제였다. 거절 쪽지에 '아차' 싶었던 나는 곧바로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 실수를 고백하고, 내 상황을 구구절절하게 털어놓았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가입 승인'이 되었다.


내 주변에는 난임인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가 없는데, 난임 카페에는 수두룩했다. 꽤나 전통 있는 카페여서 가입한 지 십 년 넘은 사람들도 있었다. 온라인 카페 안에 있으면 마치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이 다 난임인 것처럼 느껴졌다.

'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구나...'


같은 난임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난임 정보뿐 아니라 정서적인 공감과 위로를 얻었다. 특히 난임 초기에는 이 카페를 자주 들락거렸다. 성공 후기에서는 그 치열했던 과정에 같이 눈물 흘리면서 임신 노하우를 배웠고, 실패 후기에서는 위로하며 다시 일어날 힘을 서로 북돋워 주었다. 바쁜 주치의에게 물어볼 수 없는 소소한 질문들을 검색하거나 직접 질문해서 답을 얻고, 알게 된 정보는 공유했다. 먼저 성공한 사람들은 따뜻한 응원을 담아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는 물품(배태기, 임태기, 영양제 같은)들을 나눠주기도 했다.


<국민 청원 동의>

또 카페에서는 정부와 지자체의 난임 지원제도가 가진 허점을 짚어 정책 개선을 위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장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에게 편지 보내기를 함께 추진했고, 국민청원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채취 시 공난포 횟수 차감의 문제, 나이 제한의 문제 등이 개선되었다. 이 글을 빌어 정책 개선을 위해 정부 및 지자체 간담회에 직접 나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주신 카페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분들의 노고 덕분에 나 포함 많은 이들이 경제적 혜택을 받았고, 또 많은 이들이 부모가 되었다. 그러나 채취를 기준으로 지원 횟수 차감을 하는 문제, 남성 난임 문제 등 아직도 문제는 남아있어 카페에서는 여전히 청원, 지자체 제안 등을 통한 노력을 진행 중이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장과 부위원장에게 편지쓰기 참여>




난임 카페 외에 카페에서 파생된 온라인 채팅 채널도 있다. 사실 같은 난임이라고 해도 다 같은 상황은 아니다. 난임의 원인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하고자 하는 시술 유형이 다르니 다 공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카페 안에서도 자연임신/인공수정/시험관/둘째/유산/40대 첫 임신/난소/내막/근종/다낭성 등등 여러 방으로 구분해서 소통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던 중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과 실시간 대화와 맞춤형 정보를 공유하는 새로운 채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카페의 40대 심각한 '난소 기능 저하(이하 난저)' AMH 0.1 미만인 사람들이 모여 만든 채팅 채널이었다.


동병상련이랄까. 마치 말기 암환자들이 서로를 다독이는 것 같다.

"다음 진료 때는 꼭 난포가 보일 거예요."

"이번 채취에는 슈퍼 난자가 나오길 바라요"

"채취 잘했으니 수정, 분열, 냉동까지 문제없이 고고 하시길요~"

주로 이런 대화가 오고 간다. 대개는 이식까지 별문제 없이 한 번에 진행되지만, 난저는 이벤트가 다양하고 많기 때문이다. 난소가 제 기력을 잃었으니 오히려 난저인 사람들은 긍정의 언어로 더 기운을 낸다. 가끔 이 장면이 슬프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우울에 우울을 더 하는 것보다 빈말이라도 으쌰 으쌰 응원과 격려를 건네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난임 카페나 채팅 채널은 온라인 모임으로, 직접 대면하는 일은 거의 없다. 누군가는 단순히 온라인 모임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만나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고 했다. 차 한잔하며 각종 난임 정보를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만나서 걷기 운동을 하고, 종로의 약국에 영양제 투어를 같이 하고, 함께 맛집 탐방을 다니기도 한다고 했다. 난임을 숨기려는 사람들이 많아 이런 대면 모임은 별로 활성화되고 있지 않다.





난임은 내가 모르던 세계였다. 관심조차 없었던 세계. 알 필요도 없고, 진입하기 전에는 알 수도 없는 세계였다. 만약 자연 임신이 되었더라면, 이 세계는 내가 죽을 때까지 몰랐을 세계였다. 나는 그 세계의 한가운데에, 그것도 꽤나 오랜 시간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고,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은 곳이다. 아마 이 세계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다들 같은 마음일 게다.


언젠가는 이 곳에 성공후기를 남기고, 다른 이들에게 부러움 섞인 축하를 받으리라는 소망을 품으면서, 오늘도 채팅 채널에 인사를 남긴다.

"굿모닝~ 좋은 아침! 굿데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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