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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일 Oct 14. 2021

참깨를 씻다가 깨닫게 된 것들



요리의 마지막. 아무 생각 없이 후드득- 뿌리던 참깨가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작물인지 알게 된 날.


지난 추석 아버님께서 직접 농사지으신 참깨 세 봉지를 받아왔다. 매번 친정에 들러 얌체같이 “볶아주세요!” 맡기던 그 참깨를. 이번에는 한 봉지만 드리고, 두 봉지 가지고 오게 되었다.





생각이 복잡했던 어느 날,

무심결에 한 봉지를 툭- 쏟았다.



얼마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참깨들은 물이 닿자 무섭게 불어 올랐다. 집에 마땅한 체망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려봐야 별 수 없다. 차 거름망에 의지하는 자신을 원망해도 소용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오후부터 저녁까지 싱크대 앞에 서서 참깨를 씻었다. 그런 나에게 한살림 10월호의 참깨 기사가 그냥 읽힐 리가 없다. 작년 한 해 기나긴 장마와 홍수로 국산 참깨 공급량이 부족했던 일이. 어렵게 말리고 말려서 뜨거운 여름에 털어내야 하는 참깨는 20년 베테랑 농부들도 기피하는 작물이라는 사실이. 아버님의 땀이 같이 마르고, 수고가 함께 떨어졌을 참깨였다.



그러니 지나가던 둘째 아들이 “우와- 모래다!” 뒤적이다가 한 숟가락 흘려도 화내지 않아야 한다. 다시 그러모아 소중히 통에 담는다. 하지만 아무리 잘하려 한들 많은 참깨들을 잃었다. 초보자의 미흡한 손길에 하수구로 쓸려간 참깨들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 하루였다.






아주 작은 손을 가진 나는 시댁에서 주시는 음식들을 통해 나눔의 기쁨을 배운다. 늙은 청호박 두 덩이를 모셔와 열심히 깎은 날. 한 덩이를 가르니 달콤한 호박 향기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애벌레 없어요?” 작년에 샀던 늙은 호박에서 보았던 애벌레가 아들은 귀여웠나 보다. 내심 아쉬워하는 눈치다. 손질이 끝나고 손바닥이 노래지고 마디가 욱신거려도 신이 난다. 호박전을 부치고 호박죽을 끓이는 동안 아주 조오금- 철이 더 든 모양이다.


조금 슬프게도 코로나 시대에 음식을 나누는 일은 조심스럽다. 그래서 만들지 않고 손질만해서 나누지만, 그렇게 씻은 참깨와 깍둑 썬 호박을 담아 주변에 돌리면 작은 마법이 일어난다.



참깨 잘 볶았다는 인증샷과 커피 한 잔.

이웃의 고구마가 현관문 손잡이에 걸려있다.

나눔의 기쁨은 두 배가 된다는 속담의 증거인 걸까.





아들아- 호박씨를 직접 까는 기분은 어떠하니?

네가 좋아하는 약밥 위의 호박씨는 이렇게 나오는 것이었구나. 호박 속에서 호박씨를 걸러내 삼일 동안 말렸다. 이제 슬슬 까 볼까. 가위질을 시작하니 아들 둘이 재밌어 보였는지 동참한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어떻게든 일손을 붙들어 시키는 엄마는 톰 소여다. 그리고 즐거운 기억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 알바비 천 원씩 주는 일을 잊지 않았고.



가위 끝으로 오려내 잘 마른 초록빛 씨앗들을 구하는 일. 우리가 먹는 것들이 이렇게 오는 것이구나, 아들과 엄마는 함께 배운다.






올여름에도 그랬다.

바나나 크기만한 적양파 한 박스가 도착한 날. 밤 9시 컴컴한 현관 앞에 앉아 껍질을 정리해 나눠 담는다.



“양파 드실 분?” 사진을 찍어 연락을 돌린다.

행여나 망설인다면 분위기를  살핀다.  좋아하는 재료이거나, 이미 집에 넉넉하여 받기가 부담이 되는 상황일 수도 있으니. 그리고 신선하고 맛있을  나누어야 겁다. 상할까봐 떠미는 일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맵지 않아서 된장에 푹 찍어 먹기도 하고, 샐러드를 만들거나 냉라면에 썰어 넣기도 했다. 여름 내내 우리 집 식탁은 자주 보라빛이 되었다.




박스보다 좋았던 감자 보관법. 상한 것 없이 끝까지 먹었다.


“감자 좀 드릴까요?”


10킬로 박스가 도착한 날. 받을 사람 수만큼 조금씩 나누어 담는다. 나누는 것 만큼 남은 것들을 잘 돌봐준다. 공기는 잘 통하고 빛이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큰 종이봉투를 뉘어서 겹치지 않게 옮긴다. 박스채로 놔두면 감자들이 겹쳐져 두세알씩 곰팡이가 피었는데, 이렇게 해두니 한 달 넘도록 곰팡이나 싹 난 것 없이 얌전했다. 부디 관심 부주의로 여린 야채들이 버려지지 않기를-




시댁의 넉넉한 음식들을 통해 배운다.

내 손으로 오기까지의 과정과 함께 나누는 행복까지. 세상에는 직접 해봐야 알 수 있는 일들이 아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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