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와 헤어졌다. 24평 거실에 두꺼운 LED를 걸어야 한다는 게 탐탁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 당근 목록에 티비를 포함시켰고, 덕분에 이사 온 집의 거실은 넓고 가볍다. 주말마다 즐겨보던 세계테마기행이 가끔은 아쉽기는 하지만.
팔려고 했던 거실 테이블은 우리를 따라왔다. 아이들이 만든 테이프 자국과 상처가 많았던 원목 테이블. 조금 어설프긴 해도 샌딩하고 오일 스테인을 바르니 결이 고와지고 깔끔해졌다.
남편과 나는 그 과정에서 배웠다. 손길이 닿으면 물건과 공간들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가져온 가구와 짐들을 배치하고 나니, 조금은 새롭지만 결국은 우리를 닮은 집이 되었다.
아, 물론 그전에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지만…
세상사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음을 또 실감했다. 이번 4번째 이사를 통해서. 혼을 다해 살던 집을 청소하고 왔건만 앞으로 살 집의 상태는 암담했다.
체념한 듯 쌓아놓은 싱크대의 수세미와 행주들. 청소를 하다가 포기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의 흔적은 치우고 가셔야 하지 않을까… 원망스러웠다.
닫히지 않는 화장실 문과 강아지가 갉아먹은 듯한 방문틀은 어쩔 수 없다지만. 베란다를 점령한 거미줄과 일자로 길게 찢어진 방충망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사신 걸까? 그나저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은 그 다운 멘트를 날린다.
"괜찮아. 우리가 하면 되지!"
이사의 경험치가 많을수록 집수리 능력은 올라간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많을 때는 하나씩 해내는 수밖에 없다고. 위기를 맞는 순간마다 되새긴다.
손재주가 좋은 남편은 방충망 교체를 시작했다. 시내 철물점에 찾아가 준비물을 사 와 꺼낸다. 스텐 철망을 잘라 틈 속으로 로라를 밀어주고 가스켓을 끼워 넣는 작업이었다.
내가 도와준 일은 옆에서 돌돌돌 꼬이는 가스켓을 풀고 잡아주기. 방충망을 다시 끼우는 과정에서 조금 애를 먹었지만, 업체를 부른다면 20만 원 정도 들었을 작업을 4만 원이 안 되는 가격으로 해냈다.
그저 잠깐 인터넷 동영상을 보면서 "아~ 이렇게!" 몇 마디 했던 것 같은데.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대단한 이해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사 온 지 일주일,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바다 뷰가 아깝다며 베란다 창과 안쪽 창을 닦기 시작한 남편. 조그만 얼룩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뒷모습이 비장하다.
아무리 말려도 마음이 흡족해질 때까지 반복한다. 비인지 땀인지 모르지만 머리는 흠뻑 젖어 있다. 파리가 날아가다 부딪힐 정도로 투명해진 유리창들을 보고 나서야 동작이 멈춘다. 세를 냈던 거미줄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
이게 그 베란다 맞나, 싶을 정도로 말끔해졌다.
포장했던 짐들을 풀었다. 산딸기를 올려놓던 접시도 가져왔다. 첫째가 1학년 때 학교에서 만든 것인데, 이제는 둘째의 접시까지 두 장이 되었다.
유치원 때 만든 리스도 조심스레 비닐팩에서 꺼냈다. 에어컨 커버 위에 걸어 두니, 예전과 같은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이사 왔다는 걸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어디를 가도, 평수가 달라져도 그대로 인 것.
공간을 채우는 것들은
결국 우리들의 물건이고, 집을 가꾸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