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오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로 걷기가 일상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 빵 하나를 사기 위해 3500보를, 제대로 된 마트를 가기 위해서는 4000보를 걸어야만 한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차 없이 생활하는 이유는 (당연히) 차가 없기 때문이지만, 걷는 일 자체가 좋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목적이 있을 때만 걷다가, 걷기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일상이 신선하고 즐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다 근처로 산책을 갔다가 "아~ 맞다! 국간장" 호박고지 볶음에 넣을 국간장을 사러 발걸음을 옮기는 일, 일상과 여행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차선 도로 하나만 건너면 모든 상가들이 있었다. 슬리퍼를 신고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마트를 당연시 여기던 도시 생활자였다. 집을 구할 때 우선순위의 세 번째가 상가가 가까운 곳이었을 정도로 편리함에 목이 말라 있었다. 이제는 시간과 효율의 굴레에서 벗어나 천천히 걷는다. 이전의 일상에 비하면 수고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많지만, '언제 이렇게 한적하게 걸을 수 있겠어?' 생각하면 걷는 순간마다 귀하고 애틋해진다.
걷는 동안만큼은 자세히 보고 천천히 느낄 수 있다. 나무에 매달려 주홍빛으로 익어가는 감과 바짝 말라 누워있는 깻단들. 황금빛으로 물든 벼가 베어지는 순간까지 가을을 만끽했다. 때론 자전거 여행자의 스피커에서 아바의 노래 한 소절을 얻어 듣는 행운을 만나기도 하고. 걷는 일은 먼 곳의 새로운 것을 볼 수는 없지만 놓치기 쉬운 작은 것들을 볼 기회를 준다. 단, 발아래를 챙겨보는 일도 잊지 말 것. 스르륵 지나가는 뱀을 밟을 수도 있으니. 가끔 핸드폰을 보며 걷는 나를 향해 '걷는 일에 집중하세요' 훈계를 던지고 간다.
지난 주말, 우리 가족은 단풍 구경을 갔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처음으로. 어쩌면 우리가 만나서 처음으로. 하루 평균 만보 가까이를 걷다 보니 제법 다리에 근육이 생긴 걸까. 고성 화암사를 오르는 몸이 가뿐하다. '언제 이렇게 산을 잘 탔지?' 아빠와 아이들도 엄마의 가벼운 걸음에 놀란 눈치다. 한 여름을 제외하고는 계속 시달리던 수족냉증과 잘못된 자세로 인한 요통도 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건 머리가 쉴 수 있다는 것. 고민이나 생각들을 반죽된 상태로 넣고 걷다 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발효되어 나오기도 하니까. ‘걷는 사람의 발끝에서 생각이 나온다'는 철학자 니체의 말처럼 말이다.
식탁에 앉아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하늘과 파도를 바라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완벽히 적응한 건 아니었다. 밤늦도록 빛나던 인근 상가의 간판이나 도시의 시끌벅적함에서 갑자기 벗어나게 된 상황이 낯설었다. 여행을 온 것처럼 어디론가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때때로 찾아오기도 한다. 마치 홀에서 잘려 나 온 조각 케이크처럼. ‘그래도 삼각형의 삶도 괜찮습니다’라고 적막을 고요로 받아들이는 데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강원도의 날씨는 중도가 없다.
강한 바람이 불거나 계속 비가 내리면
일주일 내내 꼼짝없이 방콕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맑은 하늘이 찾아오고,
자연스레 운동화에 발을 밀어 넣는다.
'어디 한 번 슬슬 걸어볼까'
미래의 불안을 잠시 잊고,
현재의 기쁨을 누리는 마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