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릴 땐 텔레비전에서 같은 외화를 몇 번씩 반복해 틀어주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는 그렇게 보고 또 보던 영화 중 하나다. 그 영화의 주인공 알렉산더는 어릴 적 나의 우상이다. 원래 그는 아내의 감시 속에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농장 일을 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아내가 사고로 죽자 그는 당장에 농장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침대 주위에 특수 장치를 설치한 뒤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눕는다. 이제 그는 침대에서 일어날 필요가 없는데, 침대 주위에 국수가닥처럼 늘어져 있는 끈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음식부터 책까지 필요한 건 뭐든 침대 맡에 대령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발명품은 나를 환장하게 했다. 나 역시 알렉산더 못지않게 누워 있길 좋아했는데, 누워 생활하자면 불편한 점이 많았다. 가장 탐 난 건 천장에 매달린 독서대였다. 긴 시간 누워서 책을 읽으면 책을 받친 팔이 여간 아프지 않았는데 그것만 있으면 나의 팔은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 편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런 물건이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았고 있다 해도 엄마가 사줄 리 없었다. 나의 현실은 아내와 살던 시절의 알렉산더와 비슷했고, 나는 누워 뒹굴거릴 때마다 엄마의 지독한 잔소리를 견뎌야 했다.
담배가 있으면 불이 없고 불이 있으면 담배가 없는 게 인생이라더니, 엄마의 잔소리로부터 해방돼 맘 내키는 대로 누워 뒹굴뒹굴할 수 있게 되자 척추질환으로 오래 누워있을 수 없게 됐다. 나는 베개 두 개를 겹쳐 베고 목을 니은자로 꺾은 자세로 누워 책 읽고 영화를 봤는데, 그 자세로 잠깐만 있어도 목이 깁스를 한 듯 뻣뻣해지면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생전 처음 운동을 시작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의 신구는 소주를 마시기 위해 매일 운동한다는데, 나는 다시 누워 생활하기 위해 운동했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몸이 만들어졌다 싶으면 떨리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이부자리를 고른 뒤 니은 자로 고개를 꺾고 누워 베개에 머리를 대보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를 찾아오는 건 행복감이 아니라 통증이었다.
내가 잃어버린 건 누워있는 자세만이 아니었다. 누워있을 수 없게 되면서 누워서 하던 행위들의 즐거움도 같이 사라졌다. 책을 앉아서 읽게 된 뒤로 책 읽는 즐거움이 예전 같지 않았다. 누워 생활하는 건 포기한다 해도 책 읽는 즐거움까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나의 독서 경험을 어릴 시절부터 되짚어 보았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책 읽는 게 지나치리 만치 재미있었다. 나는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남아있는 페이지수가 줄어드는 게 안타까웠는데,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천천히 읽을 수도 없었다. 나는 책을 빨리 읽을 수도 천천히 읽을 수도 없는 딜레마 속에서 입안에서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사탕을 꺼내 보듯이 남아있는 페이지수를 헤아리곤 했다. 돌아보면 책 읽기의 즐거움은 그때 정점을 찍은 뒤 줄곧 하강곡선을 그려왔으니 책 읽기의 즐거움이 줄어든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릴 때 책이 그토록 재밌었던 건 처음이라는 특수성에 그 나이의 감수성이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책에도 원인이 있는 건 아닐까? 나이 들어 읽게 되는 책들이란 게 스토리는 사건이랄 게 없이 시시하고 인물들은 성격과 하는 짓이 흐리멍덩해서 폭풍 같은 재미를 느끼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어릴 적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 보기로 했다. ‘플란다스의 개’를 골랐다. 어릴 적 나는 대단히 성능 좋은 쾌락기계여서 이야기가 불러일으키는 온갖 감정에 맹렬하게 탐닉했는데, 나를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은 감정은 슬픔이다. 나는 ‘플란다스의 개’를 읽을 때마다 그 달콤한 슬픔의 격정에 휩싸이곤 했다. 기대를 품고 책을 펼쳤다. 제목 아래 작가 이름이 써 있었다. 위다(Ouida). 이 책을 수도 없이 읽었지만 작가 이름을 눈여겨본 건 처음이었다. 어릴 땐 책을 펼치면 정신없이 이야기에 빠져들었는데, 이제 나는 작가가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팔짱을 끼고 지켜보게 됐다. 작가는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목적에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악인들은 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오직 악하기만 했고 네로는 짜증날 정도로 멍청했는데, 가장 곤란한 건 파트라슈였다. 파트라슈는 개라기보다는 개의 탈을 쓴 사람으로 사람보다 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했다. 진짜로 말까지 할 줄 아는 건 아니지만,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독자에겐 그게 그거였다. 어릴 때는 등장인물들이 파트라슈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게 안타까웠는데, 이제는 파트라슈의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등장인물의 위치가 우월하게 여겨졌다. 나는 파트라슈에게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토록 사랑하던 파트라슈에게 이런 거부감을 느끼게 되다니. 책에서는 어릴 적 문방구에서 사 먹던 불량식품 특유의 첨가제 맛이 진동했는데, 어릴 적 탐닉하던 그 맛을 이제 나는 지독히 자극적이고 개운치 않은 맛이라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읽는 책의 종류는 나이 들면서 계속 변했지만 그 변화는 문학이라는 장르에 갇혀 있었다. ‘플란다스의 개’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고 뭐라 했지만, 소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장르이고 독자의 감정을 자극한다. 나는 오랫동안 소설을 읽으면서 겪게 되는 감정의 출렁임을 사랑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문학의 어조가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여겨졌고 책을 읽으며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게 쓸데없는 고생으로 여겨졌다. 살면서 몇차례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소설이 재미없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이 사탕이 달콤하지 않다는 말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뒤늦게 그들에게 공감하게 됐다. 진작에 읽는 책을 바꿔야 했다. 그런데 나는 습관적으로 읽던 책을 읽으면서 불평을 늘어놓길 계속했다.
문학의 틀을 벗어나 이전에 관심 가져본 적 없는 분야의 책을 읽게 된 건 감이당에서 공부하면서부터다. 이즈음 나는 여러 모로 새사람이 되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게 됐고, 바른 자세로 앉아서 책을 읽게 됐으며, 생전 안 읽던 동서양의 고전을 읽게 됐다. 고전들은 명성에 걸 맞는 뛰어난 사유와 주옥 같은 표현으로 채워져 있고, 안 읽었으면 억울할 뻔했다는 생각이 드는 책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그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본문을 읽는 것보다 훨씬 큰 열정으로 남아있는 페이지수를 헤아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어릴 적과는 정반대의 이유에서 말이다.
절제 있는 생활을 하면서 깊은 사유가 담긴 고전을 읽고 음미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문득문득 과거에 누리던 강렬한 쾌락에 대한 갈망이 치솟는 건 어쩔 수 없다. 정화스님은 그런 내 마음을 아시는 듯 쾌락을 경계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어느 강의시간에 스님이 하신 말씀이다. “어느 실험에서 쥐에게 먹이가 나오는 버튼과 쾌감을 자극하는 버튼 두개를 주었더니, 쥐들은 쾌감을 주는 버튼만을 누르다가 끝내 죽고 말았다고 해요. 쥐들만 그런 게 아니에요. 사람도 쾌락이 길고 강하게 지속되길 원하지요. 그러나 쾌락이란 생존에 유리한 활동에 대한 보상으로 잠깐 주어지는 것일 뿐, 필요이상 길게 지속된다면 그건 곧 죽음을 뜻합니다. 생명활동의 기본은 오히려 맹물 맛처럼 심심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아침 산책길에 꽃을 보면서 기쁜 마음이 들었다면, 오늘 하루 기쁜 마음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야 해요. 기쁨은 하루 10분이면 충분합니다.” 나는 기쁨이 하루 10분이면 충분하다는 말에 충격 받았다. 남은 인생을 고작 하루 10분의 기쁨에 만족하며 살고 싶진 않았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죽을 때 죽더라도!” 하는 갈망이 불길처럼 일었다가 허무하게 사그라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를 검색해보았다. 어릴 적 명화극장에서 본 이 영화를 기억하고 궁금해하는 이들이 나 말고도 많았고, 그들의 질문에는 친절한 댓글이 달려있었다. 이 영화는 1967년에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고 보니 주인공은 <시네마천국>에서 영사기사 역을 맡았던 필립 느와레였다. 필립 느와레는 그 당시에도 이미 젊은 얼굴이 아니었다. 족히 마흔은 돼 보였는데 그 나이에 그렇게 오래 누워 지내도 괜찮은 걸까? 병원에 일주일을 누웠다가 퇴원하려고 신발을 신는데 그새 다리 힘이 다 빠져서 고꾸라질 뻔했다는 선배의 말이 떠올랐고, 나는 자꾸만 그의 건강이 걱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