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완이가 고1 올라가서 우리는 3년 동안 꼼짝도 못해요.” 엄마가 집에 놀러 오라고 했더니 사촌오빠가 한 대답이다. “걔가 벌써 고등학생이야? 그럼 그래야지.” 둘 사이에서는 고등학교 3년 동안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아무 데도 못 가고 공부만 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같은 날 친구가 내게 영화를 보자고 했다. 나는 해야 할 공부가 많았지만 거절하기가 뭣해서 영화까지 볼 시간은 없으니 영화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사정은 이해 받지 못했고, 차 마시고 영화보고 밥 먹고 차 마시는 스케줄을 영화보고 밥 먹고 차 마시는 스케줄로 조정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차를 마시며 친구가 물었다. “무슨 공부를 하는데?” “니체.” 내가 대답했다. “그런 걸 해서 뭐해?” 친구가 물었다. “꼭 뭘 해야 돼?” 내가 되물었다.
뭘 하겠다거나 뭐가 되겠다는 생각 없이 뭔가에 매진하는 건 국민학교 입학 이후 처음인데,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감정이 사라진 건 그래서인 것 같다. 그것은 목표니 기대 같은 것들과 빛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으니까. 나는 줄곧 공허감을 피해 도망쳐 다녔다. 그것은 주로 특정한 곳에 잠복해 있다가 덮치길 잘 하는데 특히 일이 끝난 직후를 주의해야 한다. 짧은 성취감 뒤엔 어김없이 그것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하나의 영화가 끝나면 바로 다음 영화를 시작했고 그게 안 되면 다른 일거리라도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새로 할 일을 만드느라 애쓸 것 없이 작업 중인 영화의 진행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름 용의주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과의 마주침을 아주 피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뭐기에? 그것의 정체가 궁금하지만 아는 건 거의 없다. 매번 도망치느라 정신없어서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는 자리에서는 다음에 만나면 정체가 뭔지 자세히 들여다 봐야겠다며 호기를 부려보기도 하지만, 막상 맞닥뜨리면 공포감에 휩싸여 도망치느라 정신없다. 밤에 뒷산에 올라간 적이 있다. 가로등이 있는 데까지는 잘 올라갔는데, 가로등 불빛이 사라지고 깜깜한 어둠이 앞을 가로막는 순간 나는 공포에 휩싸여 미친 듯이 산길을 뛰어내려왔다. 제 정신이 든 건 불빛이 환한 큰 길에 이르러서였다. 뒷산의 어둠 속에 실제로 위협적인 무엇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것의 경우는 어떨까? 거기에 실제로 위협적인 게 있긴 할까?
공부를 하면서 익숙한 또 다른 감정이 사라졌다. 권태감이다. 권태는 공허에 비하면 견딜 만한 편이지만,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딜 가든 날 따라다녔고, 재미난 순간에조차 재미를 느끼는 감정 뒤에 무겁게 버티고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건 권태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안 됐다. 창작을 할 때는 자기가 잘 아는 얘길 할 수밖에 없는데 한 사람의 경험의 폭에는 한계가 있고 관심사도 제한돼 있어서 사실상 하나의 테마를 변주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는 나 자신을 반복한다고 느꼈고, 그런 나 자신이 지겨웠다. 무시무시한 실수로 점철된 초보시절을 지나자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일을 할 때 게임기를 든 아이처럼 몰입하는 한편 아는 게임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판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는 게임 말이다. 게임을 능수능란하게 하게 됐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갖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대부분 기시감이 드는 시행착오들이었고, 그것들은 내가 예상하는 방식으로 해결됐다. 나는 마지막 판에서 구출하게 될 공주의 모습을 아는 채로 게임을 하는 것처럼 권태로웠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친구에게 공부를 하면서는 그런 문제가 없는지 물었다. 신화를 전공하는 친구는 신화를 공부하다 보면 건축에 관심이 가고 건축을 공부하다 보면 조각에 관심이 가고 조각을 공부하다 보면 또 일상 장신구에 관심이 생기는 식으로 관심사가 계속 가지를 치기 때문에 공부가 늘 새롭다고 했다. 공부를 해보니 과연 그랬다.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심사를 따라 이 책에서 저 책으로 흘러다니다가 문득 오랫동안 권태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담배를 피우다가 가슴이 쿵쾅거려서 담배를 끊었더니 뜻밖에도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진 일이 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사라진 감정들에 대해서도 그때처럼 횡재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