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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Jun 11. 2023

목요감이당 대중지성 1학기

나이 드니 아픈 데가 많고 아픈 데가 많으니 몸에 관심이 생겨 ‘동의보감 왕초보 의역학’ 강좌를 들었다. 두 달 가까이 수업을 들었지만 내 몸에 대해 잘 알게 되는 것 같지 않아서 강좌가 끝날 때쯤엔 그 공부를 그만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강좌 매니저가 내게 목요감이당 조교를 해보라고 제안했다. 


나는 이십 년 가까이 영화를 했는데, ‘요세미티와 나’를 마지막으로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럼 이제 뭐든 다른 걸 해도 되는 걸까? 나는 오랫동안 갇혀 있다 풀려난 사람처럼 어디든 다른 곳으로 가도 된다는 게 믿기질 않아 쫓아 나오는 게 없는지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안 해본 걸 하고 싶었다. 내가 끌리는 걸 선택하면 하던 걸 또 하게 되기 십상이니 뭐든 남이 제안하는 걸 하기로 했다. 그런데 목요감이당 조교를 제안받은 것이다. 목요감이당에선 의역학과 글쓰기 공부를 한다고 했다. 또 의역학이라고? 썩 내키지 않는 걸 보니 제대로 된 방향이 맞아 보였다. 


감이당은 인문의역학을 공부하는 공동체이고 누구나 공부할 수 있는 학교 ‘대중지성’을 운영한다. 목요감이당 대중지성은 일년 과정으로 목요일마다 암송, 의역학, 글쓰기 세 과목을 공부했다. 


암송교실에서는 의역학의 기초가 되는 12경맥, 납음, 64괘 등을 소리 내 읽고 매주 그걸 외워 쓰는 한문시험을 봤다. 그런데 나는 일찍이 어학공부를 하지 않기로 결심한 바 있다. 학교 다니면서 어학 공부에 충분히 많은 시간을 썼고 그 결과 해도 안 된다는 걸 잘 알았으니 더는 거기에 시간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오랜 결심을 깰 수 없어서 첫 한문시험엔 한글로 음독을 적어내고 빵점을 맞았다. 그랬더니 재시험을 보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옥편을 찾아가며 한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매주 재시험을 간신히 면할 만큼만 시험공부를 했는데, 학기말에 지금까지 외운 거 전체를 암송한다고 했다. 분량이 무려 4페이지에 달했다. 조별로 앞에 나가 암송을 했는데 나는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댔다. 


글쓰기 시간에는 여러 권의 책을 읽었는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제일 재밌었다. 정약용은 고시를 글쓰기로 보던 시대의 공무원이라서 그런지 오늘날의 공무원과 달리 글을 너무 잘 썼다. 그의 문장은 문학가들 못지 않게 빼어났는데, 일말의 감상 없이 극도로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문학가들의 것과 결이 달랐다. 그의 면면을 알아 나가면서 교과서에서 배운 실학이 뭔지 처음으로 감이 왔다. 그는 철학과 역사부터 천문, 지리, 수학, 음악, 원예, 염색, 양계, 조리법에 이르기까지 주위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는데, 그렇게 얻은 지식과 지혜로 가난한 자식들의 생계 대책을 세우고 백성들의 살림을 살폈다. 나는 뒤늦게 다산 콜센터라는 서울시 콜센터의 작명에 무릎을 쳤는데, 다산은 백성의 어려움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다방면에 걸쳐 모르는 게 없으며, 자기가 아는 걸 남에게 가르치길 좋아하는 데다가 설명을 조리 있게 잘 하니 과연 서울시 콜센터의 모범으로 삼을 만했다. 만약 그가 오늘날 태어나 서울시 콜센터에서 일했다면 귀감이 될 만한 콜센터 지침을 책으로 남겼을 것이다. 다산은 19년의 유배 생활 동안 500권의 책을 썼는데 목민심서는 그 중 하나다. 

다산이 유배를 간 건 41살 때다. 젊지 않은 나이에 가진 걸 모두 잃고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걸어서 강진까지 유배를 갔으니 적어도 몇 달은 앓아 누워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는 유배지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아 건강이 회복됐다면서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자식들에게도 편지를 보내 폐족이 된 지금이야말로 사심 없이 공부할 찬스이니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다그친다. 그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의 절반 이상이 공부하라는 당부인데, 편지 내용으로 보아 자식들은 그의 말을 그저 잔소리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자식들은 흘려들은 그 당부가 긴 시간을 가로질러 내게 와서 꽂혔다. 


다산 선생님께,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아마도 저는 선생님이 기대하신 수신자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누누이 강조한 '모든 것의 근본인 효제'에 어긋나고 '하늘이 미워하는 게으른' 습관을 가졌으며 '농담이나 좋아하여' '자질구레한 이야기들로 한때의 괴상한 웃음이나 자아내는' 영화들이나 만들어왔으니 말입니다. 

저는 스무 해 가까이 학교를 다녔지만 공부에는 뜻이 없이 학교만 왔다 갔다 하다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야 뒤늦게 공부를 하고 싶어졌으나 하는 일에 마음이 묶여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근자에 마음에 여유가 생겨 '참으로 독서할 때를 만난 것'으로 여기고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고맙게도 생활을 꾸릴 만큼의 벌이가 있고 같이 공부할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차 소리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집에 살고 있으니 '진정으로 열심히 책 읽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여'보려 합니다. 

2013년 계사년 봄 김지현 드림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세운상가를 지나 집에 가는데 길에 2만원이 떨어져 있었다. 저만치 앞에서 취객이 바지 뒷주머니에 지갑을 집어넣으며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가 떨어뜨린 것 같았지만 굳이 불러 세우지 않았다. 그 다음 주에도 만원을 주웠고 그 뒤 격주로 5천 원과 만 원을 주웠다. 모두 수업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긴 일인데, 누군가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의 뜻으로 돈을 주는 것 같았다.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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