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관찰기
과거에 겪었던 일을 똑같이 다시 겪는 건 의외로 쉽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 된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외부 세계와 차단된 채 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활자로 고정된 그 세계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으니 책을 펼치면 토씨 한 글자 달라지지 않은 세계를 다시 살게 된다. 좋아하던 작가의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그 세계를 거닐면서 나는 네버랜드에 다시 간 웬디처럼 한때는 더 없이 크고 멋지게 보이던 그곳을 더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동안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나는 일이 일어나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지나치고 나서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달라진 나 자신에게 어리둥절해지곤 하는데, 드물게 변화의 순간을 명료하게 보게 될 때가 있다. 최근에 그런 일이 있어서 잊어버리기 전에 썼다.
식물 관찰 수업을 신청했다. 첫번째 수업 장소는 난지생태습지였다. 난지생태습지는 난지한강공원 안에 있는데, 공원은 네다섯개의 전철역에 걸쳐 있는 거대한 규모로 생태습지는 공원의 제일 안쪽에 있었다. 공원 입구에서 목적지까지 도보로 예상소요시간이 35분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데로 약속을 잡는단 말인가. 나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않는 공원을 걸으며 짜증이 치밀었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식물 관찰이고 뭐고 주저 앉아 쉬고만 싶었다.
약속장소에는 십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다가가니 강사가 반갑게 인사했다.
“김지현 선생님이시죠?”
“네.”
내가 웃지 않고 대답했다.
“찾느라고 힘드셨죠?”
강사가 물었다.
“네.”
나는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를 마지막으로 와야 할 사람이 다 온 것 같았지만 강사는 그 자리를 뜨지 않고 발 아래 풀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뭘까요?”
보도블록 틈새에 많은 풀이 자라고 있었는데 어느 풀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강사가 주저 앉아 그 중 하나를 가리키며 처음 들어보는 긴 이름을 말하자 수강생들은 그것을 받아 적고, 사진을 찍고, 풀의 생김새를 아이패드와 공책에 옮겨 그리고, 두꺼운 도감을 꺼내 대조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숲해설사로 그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취미생이라 굳이 그런 풀 이름까지 외우고 싶지 않고 외울 자신도 없어서 팔짱 끼고 서서 쳐다보기만 했다.
“식물을 관찰할 땐 멀리서 눈으로만 보시지 말고 가까이서 손으로 만져보셔야 돼요.”
강사가 말했다.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마지못해 바닥에 쭈그려 앉아 풀을 들여다보았다. 키가 손가락 마디 하나 길이도 안 되는 볼품없는 풀이었다. 어떻게 그런 풀 이름까지 기억하겠는가.
“이 작은 공간에도 얼마나 여러 종류의 풀이 있는지 몰라요. 이건 이름이 뭘까요?”
강사가 또다른 풀을 가리키며 물었다. 앞의 것 못지 않게 볼품없는 풀이었다.
“마디풀.”
한 수강생이 대답했다.
“네. 맞아요. 마디풀. 경상도 말로 천지삐까리라고 하죠. 얘네는 정말 흔한 애들이니까 이름을 꼭 기억해두세요.”
강사가 말했다. 줄기에 대나무 같은 마디가 있어서 마디풀이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마디마다 흰 알갱이가 달려 있었다.
“꽃 핀 거 보이시죠? 자세히 보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그 흰 알갱이가 꽃이라는 것 같았는데, 어찌 작은 지 좁쌀처럼 보였다.
“루페들 가져오셨죠? 루페로 보세요.”
강사가 말했다. 루페를 꼭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 먼 데까지 가서 보도블록 틈새에 있는 보이지도 않는 풀들만 들여다볼 셈일까. 나는 꽃을 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페 안 가져오셨어요?”
강사가 물었다.
“네.”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마주치는 풀 하나하나마다 걸음을 멈춰가며 30분 만에 약속장소에서 50여미터 떨어진 생태습지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는 자전거 도로와 면하고 있어서 어수선했는데 입구 안쪽으로는 양쪽으로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이 그림 같이 이어졌다. 나는 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강사는 자전거들이 오가는 입구에 서서 또 그 주위의 풀을 가리켰다.
“이게 강아지풀인 건 다 아실텐데, 무슨 강아지풀일까요?”
그 강아지풀은 머리털이 황금색이었다.
“금강아지풀. 그럼 저건 무슨 강아지풀일까요?”
강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가을 벼처럼 고개를 숙인 강아지풀이 보였다.
“가을 강아지풀이예요. 강아지풀이 종류가 많아요. 보통은 다 강아지풀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일반인이 아니니까 이름을 정확하게 아셔야 돼요.”
그러나 나는 일반인이라 강아지풀이라는 이름을 아는 걸로 족했다.
“저건 뭘까요?”
강사가 노란 꽃이 핀 키가 큰 풀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번에는 습지 입구의 풀들을 낱낱이 관찰할 작정인 것이다.
“도깨비바늘.”
수강생이 대답했다.
“거의 맞췄어요. 근데 앞에 한 글자가 더 붙죠. 털도깨비바늘. 이건 털도깨비바늘이예요. 그럼 도깨비바늘하고 털도깨비바늘은 어떻게 다를까요?”
“꽃모양이요.”
“물론 꽃 모양도 다르지만, 꽃은 일년에 며칠 안 펴요. 꽃만 보지 말고 잎을 보셔야 꽃이 없을 때도 식물을 구별할 수 있어요.”
꽃을 구별하기도 힘든 형편에 어떻게 잎을 구별하겠는가. 나는 설명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강사가 긴 설명을 마치고 걸음을 옮기기에 드디어 습지로 들어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강사가 걸음을 멈추며 외쳤다.
“여기 도깨비바늘이 있네요.”
하필 거기 도깨비바늘이 있었다. 강사는 털도깨비바늘과 도깨비바늘의 잎을 따서 손바닥에 나란히 올려놓고 그 차이를 설명했다. 한 쪽의 가장자리 톱니가 더 깊이 갈라졌는데, 어느 쪽이 도깨비고 어느 쪽이 털도깨비라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울산도깨비바늘은 잎이 또 다르게 생겼는데, 그건 가다가 보이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강사가 말했다.
울산도깨비바늘까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강사가 나의 표정을 읽은 것일까.
“다른 반에서 제가 풀 이름을 너무 많이 알려준다고 머리 아프다고 짜증을 내시는 분이 있더라구요. 근데 이 정도는 아셔야 돼요. 이 정도만 아셔도 우리가 주변에서 만나는 풀들을 거의 구별할 수 있어요. 서울에서 자라는 풀의 종류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강사가 말했다.
습지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한 시간이 흘렀고, 나는 이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다리가 아팠다.앉을 자리를 찾아 일행을 뒤로하고 혼자 습지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 겨우 말뚝 하나를 찾아 그 위에 엉덩이를 의지하고 앉았다. 습지의 풍경은 그림처럼 고요했는데, 뒤에는 강변 북로가 지나가고 옆에는 가양대교가 가로지르고 있어서 차소리가 고속도로 한 복판처럼 시끄러웠다.
다음날 아침 요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요다는 뒷문을 나서자마자 야적장의 풀을 뜯어먹었고 나는 그 옆에 서있었다. 모든 게 평소대로였다. 그런데 나는 요다가 먹고 있는 강아지풀을 보면서 머리털이 금색이 아니라 풀색인 걸 보니 금강아지풀이 아니라 그냥 강아지풀이구나 하고 알아보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저만치 가을 벼처럼 고개를 숙인 강아지풀이 보였다. 가을 강아지풀이었다. 야적장에도 가을 강아지풀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뒷문 가에 서있는 키 크고 늘씬한 풀이 낯익었다. 저 노란 꽃과 잎사귀는……바늘……도깨비바늘!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해 낸 데 놀랐고 그게 야적장에 있었다는 데 더 놀랐다. 그건 도깨비바늘이 아니라 털도깨비바늘일지도 몰랐다. 가까이 가서 잎을 살펴보니, 톱니가 깊게 갈라져 있었는데, 그렇게 생긴 게 도깨비바늘인지 털도깨비바늘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울산도깨비바늘인지도 몰랐다. 강사의 설명을 잘 듣고 기록해 두지 않은 게 후회됐다. 요다가 다른 데로 가자고 목줄을 잡아 끌었지만, 버티고 서서 발 밑을 살폈다. 마디풀이 보였다. 보도블록 틈새에서 자라던 마디풀.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는 줄기에 좁쌀만 한 흰 알갱이가 매달려 있었다. 줄기를 꺾어 안경을 코끝으로 내린 채 좁쌀만 한 알갱이를 들여다보았다. 그 작은 알갱이는 가운데 노란 수술과 다섯 장의 흰 꽃잎을 가진 완벽한 꽃이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다시 안경을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디풀이 강아지풀만큼이나 넓게 퍼져 있었다. 마디풀이 이렇게 많은 걸 어떻게 여태 몰랐을까. 엊그제까지 녹색의 덩어리로만 보이던 풀밭에서 제각각으로 생긴 풀들이 앞다투어 자신을 드러냈다. 나는 달라진 세계에 전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