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에 살게 되면서 정독도서관에 다녔다. 정독도서관은 도서관이 없던 시절에 서울에서 몇 개 안 되는 도서관 중 하나였어서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거기 다녔다. 그때는 신대방동 살 때라 집에서 한 시간씩 버스를 타고 가서 대기표를 받아 줄을 서서 또 한 한시간을 기다려야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힘들게 도서관에 들어가서는 열람실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매점에서 몇 시간씩 수다를 떨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정독도서관은 리노베이션을 했어도 모습이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이용자의 연령대는 크게 달라졌다. 예전엔 중고생이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은 성인이 대부분인데, 비슷한 나이대의 비슷한 니즈를 가진 이용자가 몰리다 보니 경쟁이 치열하다. 예전엔 중고생들이 열람실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면 지금은 열람실은 한가한 대신 자료열람실의 자리를 잡기 힘들고 인기있는 책은 언제나 대여 중이라 빌리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 외에도 대형 냉난방기에서 나는 굉음과 빈약한 식당 메뉴 등이 불만이었지만 나는 정독도서관을 좋아했다. 성대 도서관에 가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대 도서관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으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 대학도서관은 지역주민에게 개방되는데, 나는 성대가 위치한 종로구의 주민이 아니다. 그런데 성대에서 강사를 하는 ㅇ이 강사증을 빌려줘서 그 도서관에 다니게 됐다. 성대 도서관에 처음 갔을 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정문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천장 높고 탁 트인 로비가 펼쳐지는데 어찌나 넓고 쾌적하고 세련된 지 도서관이 아니라 5성급호텔 같았다. 물도 좋았다. 맨날 칙칙한 아저씨들만 보다가 화사한 젊은이들을 보니까 마음이 다 화사해졌다. 내가 꿈꾸던 아니 감히 꿈조차 꿔본 적 없는 이상적인 도서관이 그곳에 있었다.
성대 도서관 이용증을 가지게 된 이후로 집에서는 잠만 자고 종일 도서관에 가서 살았다. 산꼭대기에 있는 집을 나와 128개의 계단을 내려간 뒤 깎아지른 언덕을 내려가면 언덕을 거의 다 내려가서 골목에 뜬금없이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그걸 타고 절벽을 거슬러 올라가면 도서관 정문이 나온다. 나는 바코드를 찍고 도서관에 들어설 때마다 강사증이 빌린 거라 걸릴까 봐 떨리고 그처럼 근사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게 좋아서 설렜다. 나는 자료열람실에 자리를 잡고 공부했는데, 넓고 이용자가 적은 자료열람실은 호텔 커피숍처럼 한산했고, 서가엔 동네도서관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장서가 있었는데 학생들이 책을 안 읽는지 내가 찾는 책이 없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책을 잔뜩 가져다 너른 책상 위에 탑처럼 쌓아 놓고 읽었는데, 어려운 책을 읽다가 진력나면 서가를 어슬렁거리다 가벼운 책을 골라 소파로 자리를 옮겨 읽었고, 아래층 로비로 내려가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이기도 했다.
밤 10시에 도서관이 문 닫으면 지하의 열람실로 자리를 옮겼다. 1000석 규모의 열람실엔 늘 학생이 많았는데, 취직과 관련 없는 책을 보는 이용자는 오직 나 하나였다.
밤 12시가 되면 그 열람실도 문을 닫고 계속 남아서 공부할 사람들은 야간 열람실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가방을 챙겨 나가면서 쌩쌩한 얼굴로 야간 열람실로 들어가는 학생들이 부러웠다.
나는 성대 도서관을 나의 개인 서재나 다름없이 여겼고 그런 서재를 가진 걸 큰 기쁨이요 자랑으로 여겼다.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된 유명인의 서재를 봐도 하나 부럽지 않았는데, 아무리 서재가 크다 한들 나의 서재보다 클 순 없고 아무리 책이 많다 한들 나의 서재보다 많을 순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 서재를 청소하거나 관리하는 의무조차 지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어느 날 도서관 출입구에 강사증을 갖다 댔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ㅇ이 강사직에서 잘렸다고 하더니 강사증이 정지된 것이다. 나의 도서관을 그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종로구 사는 ㅅ에게 도서관 이용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ㅅ과 같이 도서관에 가서 ㅅ이 안에 들어가 이용증을 만드는 동안 나는 밖에서 기다렸다. 끝까지 밖에서 기다렸어야 했는데 중간에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살피러 안에 들어갔다가 그만 나의 얼굴을 아는 사서에게 발각됐고, 우리는 ‘이러시면 안 된다’는 야단을 맞고 쫓겨났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도서관에서 쫓겨나와 정처없이 걸으며 김광진의 ‘편지’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러나 그날 이용증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해도 우리 인연은 곧 끝나게 될 운명이었다. 내가 다리를 다쳐 산길을 걸어서 도서관에 다닐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공부를 그만뒀다. 도서관 때문은 아니고 앎에 대한 갈증이 해소됐기 때문이다. 겨우 4년 만에 갈증이 해소되다니 나는 공부를 오래 지속할 타입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고 해도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종일 앉아 있는 생활로 인해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져 더는 종일 앉아 있는 생활을 견딜 수 없게 됐다. 그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눈인데, 나는 오랜 나쁜 습관과 노화로 인해 눈이 약해지고 안구건조증이 심해져서 책을 오래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니 그때가 내 인생에서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던 셈인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공부를 하기 전에 뭔가에 대해 떠들다가 나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앵무새처럼 떠들어 대고 있다는 생각에 말을 더듬게 될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런 나 자신이 답답하고 부끄러웠으며 누가 그걸 알아챌까 봐 두려웠다. 공부를 하면서 내가 하는 생각의 기원과 맥락을 살펴보게 됐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면서 말을 하게 됐는데, 덕분에 뒤늦게 한글을 배워 제 이름 석자를 쓸 줄 알게 된 할머니처럼 사는 게 당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