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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Jun 11. 2023

병력

나는 체력이 특별히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쁜 편도 아니었는데, 언젠가부터 저질 체력이 돼 있었다. 건강할 때는 건강 얘기처럼 듣기 지루한 게 없더니 건강을 잃고 나니 건강얘기처럼 재미난 게 없었다.  특히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하고 모였다 하면 건강걱정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평생 건강해본 적이라고는 없는 타고난 허약 체질들로 나는 오랫동안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입장이었다. 그들과 동병상련으로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노라면 체력장에서 100미터를 25초에 뛰는, 뛰는 폼도 너무 이상한 애들과 나란히 뛰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원래 100미터를 18.5초에 뛰는 멀쩡한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이런 애들과 나란히 뛰게 된 것일까. 


시작은 36살 때였다. 산에 올라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갑자기 등산이 하고 싶어져서 관악산에 갔다 온 뒤로 무릎이 쑤셨다. 내려오는 길이 좀 가파르긴 했지만 그만한 일에 무릎이 나가다니 말이 안 됐다. 그런데 동창 모임에 갔더니 동창들이 늙수그레해진 얼굴로 자기들도 등산하고 나서 무릎이 안 좋다면서 조심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에구구 소리를 냈다. 지하철 계단을 통증 없이 오르내리게 되는 데 반년이 걸렸다. 살면서 다리를 수도 없이 다쳤지만 통증이 하루 이틀 이상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걸 예외적인 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게 시작이었다. 


47살에 계단에서 미끄러져 무릎을 다쳤다. 의사가 2주 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해서 방에만 있다가 2주째 되는 날 밖으로 나가 걸었는데, 무릎이 쑤셨다. 이번에도 지하철 계단을 통증 없이 오르내릴 수 있게 되는데 반년이 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리가 나은 뒤에도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장기간 앉아서 지낸 탓에 근육이 빠져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칫솔질만 해도 팔이 아팠다. 숟가락 들 기운도 없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종일 눕고만 싶었는데 계절 변화를 견딜 힘이 없어서 환절기에 눕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긴 시간을 수렁 같은 무기력에 시달리고 나서야 몸이라는 게 쓰지 않으면 빠른 속도로 퇴화된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나는 다리가 안 아플 때도 움직이길 싫어해서 웬만하면 움직이려 들지 않았는데, 그런 습관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집에 안 있고 밖으로 나가 걷고 등산하고 돌아다니는 삶을 살 거야. 그래서 꼭 예전의 컨디션을 되찾을 거야.” 건강 걱정을 같이 하던 친구에게 결심을 밝혔다. “앞으로 남은 날 중에서 오늘이 가장 건강한 날이고 차차 나빠질 일만 남았다고 봐. 무리하다 큰일 날까 걱정되네.” 친구가 기운 없이 대꾸했다. 그처럼 개선의 의지가 없으니 평생 저질 체력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체력은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어. 

두고 봐. 내가 하면 된다는 걸 보여줄 테니까.”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50에 길에서 전화를 하다 넘어져 왼쪽 발목을 접질렸다.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쉽게 낫지 않으리란 걸 알고 조심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체력을 회복하겠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고, 마침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계획대로 집을 떠나 산골 사는 진경이네 집에 가서 지내면서 생전 안 하던 마당 일을 도맡아 하고 생전 안 올라가던 뒷산에 올라 다녔다. 산을 오르내릴 때 발목이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통나무를 들면 그 무게가 발목으로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발목의 불편감이 찌르는 통증으로 바뀌면서 삽질하다 비명을 지르게 됐고, 자다가 발목이 아파 몇 번씩 잠을 깼으며, 다리를 절게 됐다. 두 달 만에 서울로 돌아와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산꼭대기에 사는데, 다리를 다친 뒤로 언덕을 걸어서 내려갈 수 없게 됐다. 걸어서는 마을을 벗어날 수 없으니 섬에 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마을버스 정류장에 할머니들과 나란히 앉아 있으면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우리에겐 마을버스를 타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버스 계단 세 개를 오르내리는 게 암벽 등반하는 것 같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다 무릎이 나갔고 다리를 보호하려고 손잡이에 매달리면 손목이 나갔다. 다리와 손목 어느 쪽을 희생시키는 게 나을까. 나는 버스에 오를 때마다 갈등했다. 어떤 학생이 일부러 맨 뒷자리로 가서 앉으면서 거기까지 올 수 있으면 할머니가 아니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 있는데, 다리가 불편해진 뒤로 정말로 거기까지 갈 수가 없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다리에 시선이 갔고 자리에 앉아서도 사람들의 다리만 쳐다보게 됐다. 버스계단을 힘 하나 안 들이고 오르는 다리, 자리가 있는데도 서 있는 다리, 마을버스를 안 타고 언덕을 걸어 내려가는 다리들이 만들어내는 가벼운 동작이 내게는 그 어떤 고난도의 액션보다 경이로웠다. 뛰는 걸 보면 아주 넋을 잃었다. 어느 날 버스가 신호대기에 걸려 서있는데, 길 건너에서 뛰어오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늘씬한 다리로 땅을 박차며 달리는 아이의 신체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자신의 신체 능력을 한번도 걱정하거나 의심해본 적 없는 자신감. 아이는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오더니 상기된 얼굴로 내가 탄 버스에 올랐는데, 나의 시선은 버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아이돌을 쫓듯 쫓았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 앞에 서면 6차선 도로 저쪽이 아득했다. “부탁 좀 할게요. 같이 좀 건너 줄 수 있어요?” 다리를 다치기 전 그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한 할머니가 주저하다 말을 걸었다. 그때 나는 중앙차선의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이었고 약속시간에 늦어 마음이 급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할머니는 내 팔을 잡고 천천히 걸었는데, 중앙차선에 도착했을 때 내가 잠깐 머뭇거렸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게요.” 할머니는 황급히 내 손을 놓고 혼자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를 다친 뒤로 횡단보도 앞에서 6차선 도로 저쪽을 건너다볼 때마다 그때 그 할머니의 뒤를 따라가지 않은 게 후회됐다. 


치료

멀리 다니기 힘들어서 동네 한의원에 다녔다. 의사가 일주일에 세번 오라는 걸 빨리 낫고 싶어서 다섯 번씩 갔더니 찌르는 통증이 사라지면서 발목이 아파 잠을 깨는 일이 없어졌다. 낫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 뒤로는 차도가 없었다. “제가 침을 맞은 지 100일이나 됐거든요. 일주일에 세 번씩 안 빠지고 다녔는데, 낫기는 낫는 걸까요?” 내가 벼르고 벼르다가 물었다. “그럼요. 나을 겁니다.” 의사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날부터 뜸치료가 병행됐지만 다시 100일이 지나도록 차도는 없었다. 치료를 안 받는 것보다는 받는 게 조금이라도 나을 것 같아 병원에 다녔지만 생각이 많았다. 다리를 못 쓰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발목뿐 아니라 온몸의 관절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요즘은 발목보다 무릎이 더 아파요.” 병원에 다닌 지 일년이 다 돼 가던 어느 날 내가 말했다. “환자분은 실내자전거라도 타셔야 해요.” 의사가 말했다. 그가 휴식이 아니라 운동을 권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병원에 다니길 그만두고 피트니스센터에 등록했다. 신규 회원에게 피티 3회권이 무료로 제공됐는데, 담당 트레이너가 초보자 혼자 운동하면 다칠 위험이 크다면서 피티를 계속하길 권했고, 나는 다친 다리를 또 다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무료기간이 끝나던 날 트레이너에게 전화가 왔다. 등록을 권유하는 전화였다. 그런데 그날은 눈이 많이 와서 마을버스가 산꼭대기에 있는 우리 동네까지 못 올라왔다. 마을버스가 안 다녀 못 간다고 다음 날 등록하겠다고 했더니 트레이너가 자기 차로 카드기를 가지고 우리 집에 오겠다고 했다. 나는 굳이 그럴 거 없다고 다음 날 꼭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자기 차는 SUV라 눈이 와도 언덕을 올라갈 수 있다면서 아무 때고 갈 테니 편한 시간을 알려만 달라고 했다. 내가 거듭 만류했지만, 그는 자정까지 월말 정산을 해서 센터 본사에 보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집요하게 졸랐고 결국 늦은 밤 카드기를 들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 뒤에는 그가 그처럼 열과 성을 다해 일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운동지도 보다 수다 떠는 데 더 열을 냈는데 권태롭게 구령을 붙이다가도 잡담을 시작하면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는 오전에 지하 2층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지하 1층 센터로 올라와 밤 늦게까지 그 안에만 있다 보니 시계를 보지 않으면 밤낮을 알 수 없고 날씨를 알 수도 없다면서, 결혼한 뒤론 친구들과 만날 일이 없고 아내는 퇴근해 집에 가면 자고 있어서 같이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회원들뿐이라고 했다. 피티를 받으려고 그를 만나는 건지 얘길 들어주려고 만나는 건지 헛갈리긴 했지만, 얘길 듣는 틈틈이 운동을 안 한 건 아니라서 체력이 빠르게 회복되면서 연쇄적으로 무너졌던 관절이 연쇄적으로 회복됐다. 운동 끝나고 집에 걸어갈 수 있게 됐다. 언덕 아래까지 걸어가서 마을버스를 타고 언덕을 올랐는데, 머지 않아 언덕도 걸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집과 피트니스센터만 왔다 갔다 하다가 좀 걸을 만해지자 기분이 들떠서 인사동에 밥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식당을 찾아 스마트폰을 보며 걷다가 보도블록 꺼진 곳에 발이 꺾여 넘어지면서 오른쪽 발목을 마저 삐었다. 의사는 이번에도 쉬라고 했는데, 트레이너는 의견이 달랐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다간 근육이 빠져 진짜 못 걷게 된다면서 이삼일만 쉬고 다시 운동을 하라고 했다. 삼 일 쉬고 나흘 째부터 다시 피티를 받기 시작했다. 다시 병원 침대에 누워 치료받을 생각만 해도 신물이 나서 트레이너의 말에 기대서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 뒤 레그프레스를 하다 발목에 이상을 느꼈고, 다시 그로부터 일주일 뒤 트레이너가 마사지한답시고 발목을 세게 꺾는 바람에 발목에 찌르는 통증을 얻었다. 왼쪽 발목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오른쪽 발목을 마저 망가뜨린 것이다. 


오른쪽 발목을 다치고 겨우 회복되던 왼쪽 발목이 도로 나빠졌다. 다시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녔는데, ㅅ한의원은 엄마가 개를 산책시키다 만난 이웃이 추천한 곳이다. 신길동 주택가에 있는 그곳은 첫인상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접수보는 여자가 컴퓨터가 아니라 스프링 공책을 보면서 예약을 확인했고, 내 차례가 되자 간호사가 아니라 의사가 나와서 내 이름을 불렀는데, 의사는 헝클어진 머리에 형형한 눈빛이 김수영을 닮은 50대 남자였다. 

“어디가 아프세요?” 

의사가 물었다. 

“오른쪽 다리를 접질렀어요.” 

내가 침대에 누워 대답했다. 

“아프세요?” 

의사가 오른쪽 발목을 잡아 상하좌우로 돌리며 물었다. 

“안 아파요.”  

“이런 걸 나이롱 환자라고 하죠.”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정말 나이롱 환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프세요?” 

그가 배 정중앙을 꾹꾹 누르면서 물었다. 

“네. 아파요.” 

“대동맥이 안 좋아요. 그래서 다리가 안 낫는 거예요.” 

“다리가 나을까요?” 

“다리는 금방 나을 수 있습니다. 근데 대동맥은 오래 걸리죠.” 

진단이 끝난 것 같았다. 곧 침을 놓겠구나 하고 기다리는데 기척이 없었다. 올려다보니 그가 드라큘라처럼 침대 발치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하는 걸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무안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웃음을 참기 힘들었는데 다행히 그의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니라 몸통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몇 분씩 노려보다가 침을 한 대 놓고 또 몇 분씩 노려보다가 침을 한 대 놨다. 그렇게 대여섯대의 침을 놓는 데 20분 넘게 걸렸다. 


그날 대기실에서 30분을 기다렸고 침 놓는데 20분, 침 맞고 누워있는데 1시간 해서 병원에서 총 두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 병원까지 왕복 3시간이 걸렸으니 치료받는 데 무려 5시간을 쓴 것이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려서야 거기까지 다닐 수 있을까. 치료가 끝나고 의사와 상의했다. “치료받는 게 재미있어야 돼요. 갈 때마다 좋아지는 게 느껴지고 그래서 치료받는 게 재미 있으면 하나도 힘들지가 않죠.” 의사가 말했다. 그날 치료받고 나서 다리가 한결 가볍고 편안해진 것 같았는데, 그러니까 정말 병원에 다니는 게 재미가 났다. 


그런데 의사는 환자의 몸을 노려보며 무엇을 하는 것일까. “집중하세요.” 어느 날 내가 침을 맞고 누워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의사가 다가와 말했다. “네?” “자기 몸에 집중하세요. 그러면 빨리 낫습니다. 제가 어깨가 안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파리가 날아다니는 겁니다. 신경이 쓰여서 파리를 잡으려고 팔을 올리다가 제가 악하고 쓰러졌습니다. 너무 아파서 쓰러진 겁니다. 그때 제가 누워서 손바닥을 이렇게 뒤집는 게 안 됐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제가 누워서 제 몸을 관찰하고 나아서 다음날 팔을 올리게 됐습니다. 자기 몸에 집중하면 낫습니다. 환자분들도 직접 하실 수 있습니다. 근데 환자분들은 하시기가 힘드니까 제가 대신해드리는 겁니다.” 의사가 환자 대신 환자의 고통을 느낀다는 소리 같았는데, 그게 가능할까? 그는 손발톱 위처럼 예민한 부위에 침을 놓을 땐 자기가 놀라서 “아야!” 했는데, 정말로 나의 고통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집중하세요.” 의사는 그 뒤에도 여러 번 말했다. “집중하고 있는데요.” 나는 말했다. “집착하는 거지요.” 내가 집착하지 않고 집중했다면 다리가 나았을까. 다리는 처음에는 낫는 것 같다가 다시 제자리였는데 나는 이번에도 백일기도 하듯 침을 맞으러 다녔다. 


“몇 달째 꾸준히 침을 맞고 계시잖아요. 근데 다리가 좋아지셨어요?” 

내가 그 병원에 52번째로 접수하던 날 접수 보는 여자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침을 맞고 나면 다리가 가벼워지긴 하는데 사흘을 못 가는 거 같아요.” 

나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죠? 우리 남편도 허리가 안 좋아서 원장님한테 몇 번 침을 맞았는데 며칠 지나면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사흘에 한번씩 침을 맞으라고 하나 봐요.” 

“그런가 봐요.”


나는 한의원 외에도 정형외과, 족부정형외과, 재활의학과, 신경과, 마취통증의학과, 내과, 내분비내과 등 각종 진료과목의 개인병원과 대학병원을 찾아다녔는데, 초진 때마다 어디가 아픈 지를 읊는데 시간이 여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일 아픈 곳은 다린데요, 재작년 봄에 왼쪽 다리를 접질렸고 작년 봄에 오른쪽 다리를 접질렸어요. 둘 다 처음엔 발목이 아팠는데 이제는 발바닥이 더 아파요. 뭘 조금만 해도 다치는데 일주일 전에 스트레칭하다가 발가락하고 오금을 다쳤어요. 무릎은 안 좋은 지 오래됐고, 오른쪽 고관절은 가만있어도 아파요. 요즘은 발목도 발목이지만 손목이 더 불편해요. 손가락도 안 좋구요.” 의사들은 한 번에 한 군데밖에 치료를 못 한다면서 가장 불편한 곳을 선택하라고 했는데, 매번 선택이 쉽지 않았다. 


나의 병원 쇼핑은 국내에 한정되지 않았다. 나는 집에만 앉아 있기가 지겨워 자리라도 옮겨 앉아 있으려고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도 병원에 다녔다. 미얀마의 전통 클리닉에서는 인도식 치료를 했는데 허브 가루를 넣은 천주머니를 오일에 적셔 환부에 문지르는 치료는 소꿉장난하는 것 같이 재미났지만, 효과는 역시 미미했다. 치료의 효과가 미미한 데 비해 부작용은 심각했다. 


정형외과만 다니다가 안 되겠어서 보다 전문적인 진단과 치료를 위해 족부정형외과에 찾아갔다. 5층 건물을 통째로 쓰는 큰 병원이었는데, 진료실 구조가 특이했다. 나란한 두 진료실 사이에 문이 나 있었는데 원장이 두 진료실을 오가며 환자 둘을 동시에 봤다. 칠순이 넘어 보이는 원장은 왔다 갔다 하느라 한번 앉지도 않고 일했는데, 그 나이에 종일 서서 일할 수 있는 다리를 가졌다니 부러웠다. 원장은 몇 가지 검사결과를 확인하고 나서 다친 부위가 이미 나았다고 단정지어 말했다. 그는 나의 발바닥 아치가 높은 편인데 그게 무너진 게 문제라면서 아치를 지지할 수 있는 깔창을 처방해줬다. “그게 치료인가요?” 내가 물었다. 나는 발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는 게 치료라고 믿고 있었는데, 깔창은 임시적인 처방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치료죠.” 원장이 명료하게 대답했다. 병원 안에 깔창을 제작하는 가게가 있었는데 깔창 가격이 25만 원이나 했다. 깔창을 팔아먹으려는 상술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면서 깔창을 주문했다.


뜻밖에도 깔창을 하니 걷기가 훨씬 편했다. 그런데 왼발은 효과가 오른발만 못해서 다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깔창 높이를 조금 높여줬다. 그 뒤로 왼발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통증을 깔창과 연관 짓지 못했다. 어느 날 마을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발이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불현듯 짚이는 게 있어 집에 들어가 신발을 벗었더니 통증이 약해졌다. 깔창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깔창을 반년 넘게 하고 다녔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발의 아픈 부분이 살짝 변형돼 있었다. 


한약의 부작용도 겪었다. 어느 한의원에서 한약 3제를 연달아 지어먹고 설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설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6개월이나 계속됐다. 


민간요법의 부작용도 겪었다. 엄마가 관절에 좋다면서 무화과 잎 다린 물을 보냈다. 그 물을 데워 발을 담그고 있었는데, 발 전체가 불에 덴 것처럼 벌겋게 일어나면서 미친 듯이 가려웠다. 가려움증은 몇 달을 갔는데, 다리로 인해 겪은 여러 고통 중에 강도로 치면 이 고통이 제일 컸다.  


도수치료의 부작용도 겪었다. 도수치료를 받으러 갔더니 치료사가 틀어진 척추가 발목에 영향을 줬을 거라면서 척추를 마사지했다. 다음 날 평소와 다름없이 천천히 길을 걷는데 허리 중간에서 서랍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허리를 삔 것이다. 물리치료사에게 전화했더니,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병원에 알렸냐고 물었고, 아니라고 했더니, 일단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라고 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빈말로라도 나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트레이너가 발목을 세게 잡아 꺾어 발목이 나가고 나서 트레이너에게 그 얘길 했는데, 그날 운동 끝나고 카운터를 지나는데 트레이너가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카운터 앞을 지키다가 내가 카운터를 지나쳐 출입구로 향하는 걸 보고서야 제자리로 돌아갔는데, 내가 센터에 불만을 말할까 봐 그러는 것 같았다. 깔창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을 때 족부정형외과에 연락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듣기로 그 병원에는 고객의 불만을 처리하는 담당자가 따로 있다고 하니, 연락했다면 보다 전문화된 자기 방어를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야 어떻게 되든 자기 걱정만 하면 서운했는데,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면 또 그것처럼 피곤한 게 없었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해서 다리가 안 나아서 어떡하냐고 우는 소리를 했고, 용하다고 주워들은 병원에 가보라고 했고 안 가면 갈 때까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졸랐으며, 관절에 좋다는 음식을 환이나 엑기스로 만들어 보냈는데, 안 먹는다고 보내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무화과 잎 다린 물도 그것들처럼 냉장고에서 썩혔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나를 걱정하던 엄마도 자신이 비난받을 상황에 놓이자 나를 걱정하지 않고 자기를 방어했다. 두드러기가 생겼다고 하자 엄마는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몇 번씩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너만 왜 그렇게 별나니.” 라며 내 탓을 했다.


엄마가 걱정하는 소리를 하면 그만 좀 하라고 짜증내며 전화를 끊었지만, 나는 눈 떠서 잠 들 때까지 다리 걱정을 멈출 수 없었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들볶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불편한 다리에 적응한 지 오래였고 스스로 들볶지만 않는다면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다리가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살기로 하고 치료와 운동을 모두 그만 뒀다. 그러자 관절이 한결 편해졌는데, 그동안 했던 노력이 무리가 돼 관절이 더 안 좋았던 것이다.


후기

몇 달 뒤 종로에 있는 가게에서 샌들을 사서 신고 나왔다. 집을 향해 걷다가 발이 아프면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학로를 지나도록 발이 아프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샌들은 아웃도어용으로 발바닥 아치가 유난히 높았는데, 발이 안 아픈 건 그래서였다. 족부정형외과 원장을 줄곧 원망하고 있었는데 그때 맞춘 깔창이 발에 맞지 않았을 뿐 그의 처방이 맞았던 것이다. 발에 맞는 깔창을 하면 되는 걸 가지고, 그동안 했던 뻘 짓을 생각하니 기가 찼다. 눈이 근시면 안경으로 교정하면 되는데, 병원을 돌아다니며 백 가지 검사를 하고 눈 운동하러 다니고 눈에 침 맞고 보약 먹고 별별 짓을 다 한 격이었다. 


54살에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언덕을 걸어서 올라갔다. 4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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