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와는 한 동네에서 자랐는데 같이 다니면 자매냐고들 했다. 우리는 하고 다니는 스타일도 그렇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비슷해 그럴 수 없이 말이 잘 통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만났고 만났다 하면 잠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지만, 헤어질 때면 못다 한 얘기가 한 보따리였다. 같이 자주 가던 카페가 있다. 우리는 매번 카페가 문 닫을 때까지 수다를 떨다가 카페가 문 닫으면 불 꺼진 간편 옆에 주저앉아 얘기를 계속했고 그러고도 할 얘기가 남아 서로의 집을 몇 번이나 왕복하다 헤어졌는데, 집에 가서도 엄마가 전화 끊으라고 소리지를 때까지 전화통을 붙들고 있다가 잠들곤 했다. 혼자 있을 때도 머릿속에선 A에게 해줄 말이 쏟아졌다.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들과 새로 보고 들은 것들에 관한 생각들. 나는 뭐든 재미난 걸 보고 들을 때마다 A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조바심쳤고 속으로 대본 연습하듯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했는데, 마침내 A와 만나 그 이야기들을 쏟아내면, A는 내가 예상했던 곳에서 웃음을 터뜨려 나를 즐겁게 했다.
우리는 서른 즈음부터 만나지 않게 됐는데 몇 번의 이사를 거쳐 다시 한동네에 살게 됐다. “흰 머리가 좀 생겨서 그렇지 하나도 안 변했네.” 다시 만나던 날 A가 말했다. “그럴 리가.” 나는 대답했다. 그런데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예전엔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이제 우리 사이에선 공통점을 찾기 힘들었다. 나는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아득한 거리에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A에게서 B가 보였다. 둘이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는데, 그러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 같았다. 우리가 생각보다 훨씬 쉽게 가까운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A로부터 멀어진 것일까? 나는 C를 떠올렸다.
C는 대학 동창인데 대학 때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인상적인 대화를 나눈 기억도 없다. 그런데 졸업하고 자주 어울리게 되면서 점점 서로의 말에 맞장구 치게 되더니, 언젠가부터 누구보다 말이 잘 통하는 사이가 됐다. 특히 이야기에 관한 취향은 같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일치해서, 내가 재밌어 하는 이야기는 C도 재밌어 하고, 내가 별로라고 느끼는 건 C도 그랬다. 수많은 책과 영화를 같이 보고 같이 씹고 같이 감탄하는 사이 우리의 취향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가까워졌을 것이다. 나는 시나리오를 쓰면 제일 먼저 C에게 보여줬고 가슴 두근거리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C는 내가 기대했던 곳에서 웃음을 터뜨렸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재미있다고 말해주었는데, 나는 그제야 내가 쓴 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C를 ‘객관적인 나’로 여겼고, 나 자신보다 C의 평가를 더 신뢰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C가 나의 시나리오를 보면서 웃지 않았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눈길을 피했다. 슬럼프가 계속되는 동안 C가 예전처럼 웃으며 재미있다고 말해주는 순간이 다시 오길 얼마나 바랐던가. 나는 그렇게 C의 표정에 나를 비추고 그 반응에 나를 조율하면서 A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다.
A와는 도로 만나지 않게 됐고 C와도 차츰 멀어졌다. 할 얘기는 보따리 보따리 생겨나는데 그 얘길 나눌 친구가 없어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하고 싶은 얘기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 시나리오가 아닌 글을 처음 쓴 건 중국과 티베트를 여행하면서다. 나는 모처럼의 여행이 너무 재밌어서 그 얘길 C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런데 C가 재밌어 할 것 같지 않았다. 말하는 사람만 재밌는 얘기로 꿈, 아기, 반려동물 얘기를 꼽는데, 거기엔 외국여행이 포함돼야 한다. 내가 재미나게 느낀 걸 C도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공들여 여행기를 썼다. 글을 쓰는 건 재밌었고 C도 그 글을 재밌어 했다. 그 뒤로도 할 얘기가 있으면 글을 쓰게 됐다. 그런데 수신자는 더는 C가 아니었다. 나의 생각은 언제나 친구를 향한 말이었기에 나는 생각을 구어체로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어줄 구체적인 대상을 떠올릴 수 없게 되자 생각이 문어체로 바뀌었다. 나는 문어체로 생각하고 문어체로 글을 썼다. ‘작가가 글을 쓰는 건 같이 말할 친구가 없어서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을 보며 친구가 없는 작가의 쓸쓸한 처지를 가엾게 여겼는데, 막상 내가 그 처지가 되고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쓸쓸하지는 않았다. 글을 쓰면서 새로운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바로 나 자신이다. 허구한 날 마주 앉아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나 자신과 친해진 것이다.
2.
C뿐 아니라 가깝게 지내던 대부분의 친구들과 소원해졌다.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게 전처럼 재밌지 않았다. 오래 전 선배에게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그는 주말마다 친구와 캠핑을 같이 하는데, 몇 년째 캠핑을 같이 하다 보니 집안 얘기부터 일 얘기까지 서로 간에 안 한 얘기가 없고 더 얘길 해봐야 다 몇 번씩 하고 들은 얘기라 고기 구워 먹을 때도 말 한마디 안 하고 고기만 먹는다고 했다. 할 말은 자주 만나는 사이일수록 많아지는 게 아니던가. 나는 친구와 할 수 있는 얘기를 다 해버려서 더는 할 얘기가 없다는 선배가 이상하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 그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경험과 관심사는 그리 넓지 않아서 얘길 하다 보면 같은 이야기가 변주되고, 종종은 변주조차 없이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오래된 친구 사이의 대화에는 외울 만큼 잘 아는 레퍼토리들이 반복되는데, 그 얘길 듣는 게 꼭 따분한 건 아니다. 나는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또 듣는 것처럼 그 얘기들을 듣기를 즐겼는데 언젠가부터 그럴 수 없게 됐다.
익숙하고 좋아하던 일에 흥미를 잃게 되는 것과 동시에 그렇지 않던 일에 흥미가 생겨났다. 동창 모임 중에 공대가 주축이 된 모임이 있는데, 전에는 거기에 잘 나가지 않았다. 피차간에 별 공감대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그 모임에 안 빠지고 나가게 됐다. 전기기사, 컴퓨터 수리 기사를 사적인 자리에서 친구로 만나는 게 신선하고고, 아파트 짓고 컴퓨터 고치는 얘길 듣는 게 재밌었다. 여러 사람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어울리는 자리도 좋아하게 됐다. 전에는 공통의 화제를 찾지 못해 겉도는 얘기를 하는 시간이 지루했는데, 그런 시간이 낯선 지방 도시에 내려 서성이는 것처럼 나쁘지 않아졌다.
D를 만난 건 그런 모임에서다. 우리는 문학 세미나를 같이 했는데, 그는 세미나는 물론 뒤풀이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는 스무 살인데 나머지 멤버는 모두 50대였다. 그의 나이 때 나는 서너 학번 위의 선배들과도 거리를 뒀는데, 그는 왜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일까?
“친구 없어?”
어느 날 내가 물었다.
“없어요.”
D가 대답했다.
“학교에 친구 없어?”
“없어요. 처음엔 과 애들하고 피씨방 같이 가서 게임도 하고 그랬는데, 너무 게임 얘기만 하니까, 저도 게임을 좋아하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학교 밖에서 모임을 찾다가 여길 알게 됐어요.”
“여기 선생님들이랑 얘기하는 게 재밌어?”
“네.”
“그래? 자기 나이 때는 또래랑 노는 게 재밌지 않나? 물개박수치고 웃고 떠들면서.”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그렇게 놀아본 적이 없어요. 대학교 애들은 저를 불편해해요. 자기들끼리는 친한데 제가 끼면 분위기가 조심스러워져요.”
“왜?”
“제가 말이 느리고 심각한 편이라, 제 또래들은 제가 말하는 걸 잘 못 참아해요.”
그 나이 때 나도 말이 느리고 심각한 걸 못 참아 했다. 그때 나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참을성이 전혀 없었다. 나와 비슷한 친구들하고만 어울리고 싶어 했고 그런 친구가 있는 걸 다행스러워했다. 그런데 그게 꼭 좋기만 한 일이었을까. 내가 거울 같은 관계에서 나 자신을 반복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탐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여기 선생님들은 제 말을 끝까지 잘 들어주시기도 하고 또 제가 학교에선 만날 수 없는 분들이라 배우는 게 많아요.”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의 나이 때 나와 비슷한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면 다른 관계에 눈을 돌렸을 지 모른다. 대학생 때 이런 자리에서 이런 대화를 했다면 어땠을까. 가지 않은 그 길이 궁금했는데, 나는 이제야 그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