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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Jun 11. 2023

하루

보온밥솥이 없던 시절엔 밥을 뚜껑 있는 공기에 담아 아랫목에 보관했다. 당시 드라마에는 저 기분 날 때 들르는 남편이나 자식을 위해 매일 새로 밥을 해서 아랫목에 넣어두고 기다리는 여자들이 자주 등장했는데, 영화를 하면서 내가 그 여자들 같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저 기분 날 때 들르는 님이고. 님이 언제 올지 모르니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다. 집을 비웠다가 그 사이에 님이 왔다 가버리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님은 가물에 콩 나듯 왔고 와서도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 곁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기만 했다. 그런데 ‘요세미티와 나’를 만들 때였다. 영화를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내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사랑이 식은 것이다. 


이제 님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동안 님을 기다리느라 못했던 걸 하기로 했다.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공부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훨씬 빨리 들었다. 4년만에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밖에 나가자 마자 다리를 다쳐 도로 책상 앞으로 돌아오게 됐다.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주로 촬영을 떠올리게 되는데, 영화를 하면서 촬영을 한 날은 며칠 안 된다. 촬영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시나리오를 썼고, 맨날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연애 상담하다 상담해주던 친구와 사귀게 되는 것처럼 글쓰기와 친해졌다. 영화를 관두면서 글을 쓰려고 생각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게 되고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영화 할 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쓰며 보내는데 글 쓰는 마음 자세는 달라졌다. 예전엔 글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에 따라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갔는데, 지금은 글이 잘 되면 좋지만 아니면 내일 또 쓰자고 생각한다. 예전에 글쓰기가 목표지점까지 가기 위한 허들 중 하나였다면 요즘 글쓰기는 매일의 루틴 중 하나다.


“너는 왜 집에 가잔 말을 안 해?” 친구들은 내게 묻곤 했다. 나는 놀다가 집에 가고 싶었던 적이 없다. 언제나 더 놀고 싶었지만 남들이 집에 자고 일어나면 따라 일어나야 했는데, 집에 가서도 피곤하거나 졸리지 않았기 때문에 새벽까지 책이나 영화를 보다 잤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났다. 내게는 하루 24시간이 너무 짧아서 도저히 그 시간 안에 놀고 싶은 만큼 놀고 자고 싶은 만큼 잘 수가 없었다. 지구의 자전 주기와 나의 생체리듬이 맞질 않았던 것인데, 그게 이제야 맞는다. 


요즘 나는 해 뜰 때 눈을 떠 밤이 되면 잔다. 밤이 되면 자는 것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지는데, 잠을 깊이 자지는 못해서 아침에도 피곤하다. 잠이 깨도 몸이 무거워 일어나기 싫지만 그래도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으려고 한다. 더 누워있어도 잠이 오는 건 아니고, 그 시간에 글이 잘 써지기 때문이다. 나의 소화기관과 뇌는 아침에 컨디션이 제일 좋다. 아침에는 뭘 먹어도 소화가 되는데 저녁에는 땅콩 한 알도 트림과 설사를 일으키고, 아침에는 글에 집중할 수 있고 가끔은 좋은 생각이 나기도 하는데 저녁에는 간단한 문장 하나를 말하는 데도 버퍼링을 일으킨다. 나의 하루는 가난한 집에서 세수하고 난 물로 발 씻고, 발 씻고 난 물로 걸레 빨고, 

걸레 빨고 난 물로 변기 물 내리는 것처럼 아침에 머리가 제일 맑을 때 글을 쓰는 것으로 시작해, 책 읽고, 집안 일 하고, 운동하고, 마지막에 유튜브 듣다가 자는 것으로 끝난다. 유튜브를 나중에 듣는 건 그게 덜 중요해서는 아니다. 일단 걸레를 빨아버리면 그 물로 세수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아침부터 유튜브를 듣기 시작하면 종일 유튜브를 듣게 되는데, 그게 처음엔 편하고 좋은 것 같아도 나중엔 진력이 나면서 저녁까지 유튜브를 아껴두지 않는 걸 후회하게 된다. 전식 본식 후식의 순서를 따를 때 각각의 음식 맛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하루를 잘 살기 위해서는 일과순서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 


하루를 잘 사는 건 쉽지 않다. 먹고 자고 유튜브 보는 건 항상 지나치게 하고 싶고 운동과 글쓰기는 항상 하기 힘들어서 그렇다. 나는 걷기, 물속 걷기 같은 쉬운 운동만 하기 때문에 운동은 현관문만 나서면 그 뒤엔 별 저항 없이 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벤치 프레스 같은 근육 운동을 했다면 바벨을 들 때마다 상당한 의지를 내야 했을 것이다. 글을 쓰는 게 그런데, 매 문장을 쓸 때마다 바벨을 드는 기분이다. 그래도 운동과 글쓰기 모두 꾀 부리지 않고 정해진 시간을 하려고 한다. 수많은 하루를 이렇게 저렇게 살아본 결과 하루 2시간 운동하고 5시간 글을 썼을 때 컨디션이 좋고 잠을 잘 잔다는 걸 잘 알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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