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식물관찰수업에 참여했다. 선생님을 따라 공원을 돌아다니며 식물을 관찰했는데, 처음엔 두세 시간씩 걷는 것도 힘들고, 생전 처음 듣는 식물의 이름을 익히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몇 번 나가다 보니 걷는 것도 덜 힘들고, 식물 이름도 생각보다는 쉽게 외워졌다. 나는 주위의 식물을 알아보게 되면서 막 글을 배운 아이가 간판을 읽으며 다니는 것처럼 보는 식물마다 이름을 알아 맞히는 데 열중했다. 도깨비바늘, 털도깨비바늘, 망초, 개망초, 구절초, 벌개미취, 쑥부쟁이. 그런데 겨울이 되자 풀은 누렇게 말라죽고 나무는 꽃과 잎을 떨구고 가지만 남았다. 막 글을 배워 책 읽기에 재미를 붙였는데, 읽을 책이 싹 사라진 것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쉼 없이 모습을 바꾸던 나무들은 겨우내 죽은 것처럼 활동을 멈췄다. 낙엽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소나무나 사철나무 같은 상록수도 두꺼운 잎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버려진 조화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죽음 같은 잠에 빠진 겨울 들판에서 홀로 파릇하게 살아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식물이 있었다. 그것들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도 얼어 죽지 않고 폭설이 와도 눈이 녹으면 녹은 눈 사이로 파릇한 잎을 드러냈다. 이년생이나 다년생 풀의 월동형인 그것들은 봄여름에는 제 각각의 모습으로 지내다가 날이 추워지면 비슷한 디자인의 월동복으로 갈아입는다. 잎을 바퀴살처럼 방사형으로 펼치고 포복하듯 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모양이 그것인데, 넓게 펼친 잎은 햇빛을 최대한으로 받기 위한 것이고 납작한 자세는 바람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늦가을부터 그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은 그것들을 로제트 식물이라 불렀다. rosette는 장미모양이라는 뜻인데, 이름을 듣고 나니 잎사귀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납작하게 겹쳐진 모습이 종이접기로 만든 장미처럼 보였다. 나는 예쁜 모양, 예쁜 이름에 반해서 그것들 하나하나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민들레, 망초, 냉이, 꽃마리, 뽀리뱅이. 선생님은 그것들이 보일 때마다 쭈그려 앉아 이름을 가르쳐줬는데, 생김새가 비슷비슷해서 구별이 쉽지 않았다. 민들레나 망초처럼 봄여름의 모습을 아는 건 그나마 좀 나은데, 이름조차 처음 듣는 건 더 그랬다. 식물수업은 날이 추워지기 전에 끝났고 나는 겨우내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정체를 궁금해해야 했다.
봄을 기다리지 않은 해가 없지만, 올해는 그 마음이 유별났다. 식물수업에 봄여름시즌을 놓치고 가을겨울시즌부터 참여했는데, 영화가 끝날 때쯤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격이라 앞 부분이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긴긴 겨울 끝에 마침내 날이 풀리기 시작했지만, 겨울이 순순히 물러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해마다 매화와 산수유 가지를 살피며 봄 소식을 기다렸는데, 겨울눈은 좀처럼 깨어날 기미가 없고 추위는 몇 번이고 되살아나 나를 실망시키곤 했다. 그런데 올봄, 그동안 더딘 봄 소식에 조바심친 게 번지수를 잘 못 짚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됐다. 봄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건 매화나 산수유 나무가 아니라 로제트 식물이다. 로제트 식물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나 이상으로 성급해서 날이 풀리자 마자 꽃대를 올리더니 순식간에 꽃을 피웠다. 그것들이 녹색의 잎을 지니고 겨울을 나는 건 봄에 제일 먼저 꽃을 피우기 위해서인 것이다. 아직 추위가 물러나기 한참 전이라 꽃가루를 나를 곤충이 눈에 띄지 않아 걱정됐는데, 꽃들이 오죽 잘 알아서 피었겠는가. 꽃이 피면 식물의 정체를 아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다음 꽃 검색 앱에 꽃 사진을 찍어 물어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제일 먼저 꽃을 피운 건 꽃마리였는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었나 했더니 나비 더듬이처럼 돌돌 말린 꽃대가 풀리며 봉오리들이 피어났다. 이어서 광대나물, 주름잎, 제비꽃이 앞다투어 피어났고 흙이 있는 곳은 어디나 키 작은 꽃들의 꽃밭이 됐다. 아직 추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발 밑은 벌써 꽃 천지였다.
이어서 산수유, 목련, 개나리 벚꽃이 피기 시작했고, 검색 앱으로 일일이 이름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꽃이 줄줄이 피어났다. 나는 틈날 때마다 밖에 나가 돌아다녔는데, 새로 핀 꽃과 마주치면 일단 그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에 취한 다음 모가지를 꺾어 보드라운 꽃잎을 떼어낸 뒤 그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식물이 동면에 들어간 겨울 동안 식물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책에서 본 꽃의 구조도 그대로 여러 개의 수술이 하나의 암술을 둘러싸고 있었고 손톱으로 씨방을 쪼개면 그 안에는 구슬 같은 밑씨가 가득 들어 있었다. 관찰이 끝나면 꿀샘에서 흘러나와 씨방을 감싸고 있는 단물을 핥아 먹었다. 우리 감각을 이처럼 골고루 만족시키는 게 꽃 말고 또 있을까.
그러나 꽃이라고 해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꽃은 충매화뿐이지 거기에 풍매화는 포함되지 않는다. 충매화는 꽃가루의 운반을 곤충에게 의지하기에 곤충을 유혹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눈에 띄는 화려한 모습, 향긋한 냄새, 달콤한 꿀은 모두 곤충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꽃가루의 운반을 바람에 의존하는 풍매화는 사정이 다르다. 곤충과 달리 오호가 없고 미추를 구별하지 않는 바람에게는 애써 잘 보이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데, 풍매화가 꽃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건 그래서다. 길을 가다 꽃을 보면 저절로 걸음을 멈추게 되지만 풍매화를 보고 그랬던 적은 없는데 올봄 신갈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꽃이란 꽃을 다 관찰하겠다는 열의에 불타 풍매화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꽃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을 쳐다보니 숨은 그림 찾기의 숨은 그림이 드러나듯 잎들 사이로 잎과 같은 색의 수꽃이 눈에 들어왔다. 주렴처럼 생긴 수꽃이 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처음에 잘 안 보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암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참을 살핀 끝에 잎 겨드랑이에 씹다 버린 껌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설마 했는데 그게 암꽃이었다. 신갈나무 꽃을 찾는 데 성공하고 나자 숨어있는 풍매화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벚꽃, 목련, 개나리가 화려한 꽃을 피우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회양나무, 향나무, 뽕나무가 조용히 꽃을 피웠는데, 나무 한 가득 핀 풍매화를 볼 때마다 그때까지 그걸 못 보고 지나친 나 자신에게 놀라게 됐다.
꽃들이 릴레이하듯 피고 졌다. 신갈나무 꽃이 지자 뽕나무 꽃이 피었고 그게 지자 회양나무 꽃이 피었으며 그게 지자 또 다른 꽃들이 봉오리를 터뜨렸다. 그러는 사이 나무 밑에선 야생초 꽃들이 음원 차트의 곡처럼 빠르게 자리를 바꿨는데, 이른 봄 키 작은 꽃들이 독차지했던 곳에서는 키 큰 고들빼기와 뽀리뱅이가 꽃을 피웠고, 그 옆에선 봄망초와 지칭개가 부지런히 키를 키우고 있었다.
올봄 이전엔 봄의 식물들이 멀리 갈색 산에 연두와 분홍이 점점이 번져가는 모습으로 보였다. 낭만적인 풍경 사진처럼 디테일이 뭉개진 뽀샤시한 이미지였다. 그런데 올봄엔 식물들이 전혀 달리 보였다. 꽃과 잎의 디테일 하나하나가 눈으로 밀려들어왔다. 길에서 모르는 이들은 얼굴이 지워진 흐릿한 무리로 지나가는데,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인식되는 것처럼 이름을 알게 되자 그 이름이 가리키는 풀과 나무가 흐릿한 풍경에서 떨어져 나와 제 각각의 모습을 드러냈다. 돌돌 말린 꽃대를 가진 꽃마리, 잎 겨드랑이에 껌딱지 같은 암꽃이 붙어있는 신갈나무, 꽃 깊숙이 꿀이 흥건하게 고인 명자나무, 하루 새 한 뼘이나 자란 뽀리뱅이. 나는 달라진 봄의 면모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