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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Sep 21. 2023

산책

“김지현!”

“어디야?”

“지하철 역 있는 데로 나와. 내가 반찬 가지고 왔으니까 절에까지 가지고 가려면 힘드니까 어?”

“어딘데?”

“역 있는 데로 나올 수 있지?”

“지금 어디쯤 왔는데?”

“어?”

“지하철역 어디쯤 왔는데?”

“지하철역에서 만나?”

“아니, 엄마 지금 어디냐고?”

“어?”

“엄마 지금 어디냐고?”

“지하철 니네 동네 역 말이야.”

“한성대입구 역이야?”

“어?”

“한성대입구역에 있어, 지금?”

“니네 동네 말이야 4호선 거기에서. 내가 지금 4호선 탔거든.” 

“알았어.”

“거기서 기다릴게 역에서.”


22년 12월 21일 한성대입구역에서 건네받은 검정 비닐 봉지 안에는 멸치볶음 한 줌, 다진 마늘 한줌, 찐 고구마 작은 것 네 개, 소포장 된 구운 김 두 봉지가 들어있었다. 그게 엄마가 해다 준 마지막 음식이다.  


나는 마흔에 분가했는데 엄마는 나와 전화할 때마다 밥 먹었냐, 반찬은 뭐해서 먹었냐고 물었고, 내가 잘 먹질 못해서 기운이 없다면서 틈만 나면 반찬을 해 날랐다. 엄마가 천안 북면에 있는 자기 집에서 십여 분 거리를 운전해 연춘리에 차를 주차한 뒤 버스로 갈아타고, 천안역에 내려 전철로 갈아타고, 합정역에서 내려 다시 빨간색 광역버스로 갈아타고 파주에 있는 나의 집에 가져온 비닐봉지 안에는 불고기, 멸치볶음 한 줌, 오이지 한줌, 볶은 깨 한 줌, 사과 두 알이 들어있었다. 나는 멀리까지 온 엄마와 산책이라도 하며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엄마는 가져온 반찬으로 같이 밥을 먹고 나면 늦기 전에 가야한다면서 서둘러 일어섰다. 


파주에서 얼마 안 살고 성북동으로 이사했는데, 엄마가 다니는 절이 마침 근처라 엄마는 절에 올 때마다 반찬을 해가지고 왔다. 안 먹는다고 가져오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가져와 벨도 안 누르고 대문 앞에 놓고 갔다. 또 일주일이 멀다고 택배를 보냈고 상자 안엔 김치, 고구마, 옥수수 같은 부피 큰 음식이 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나의 작은 냉장고는 언제나 엄마가 보낸 김치로 꽉 차 있었고, 싱크대 선반에는 몇 개인지 모를 깨와 고춧가루 봉지가 처박혀 있었으며, 신발장에는 고구마 상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좁은 집에서 몇 달씩 자리를 차지하고 썩어가는 그것들이 내겐 크나 큰 스트레스였다. “안 먹어. 보내지 마.” 엄마가 택배를 보낸다고 할 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먹으려면 말아. 그럼 나도 편하고 좋지.” 엄마는 그렇게 대꾸했지만 며칠 후면 어김없이 택배가 도착했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 나는 택배가 올 때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냈고 엄마는 다시는 음식을 안 보낸다고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지만 며칠 후엔 또 택배가 왔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은 십년 가까이 계속되다가 내가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서야 끝이 났다. 이사할 때 엄마는 냉장고를 큰 걸로 사라고 100만원을 줬다. 넓은 집에 큰 냉장고가 있으니 엄마가 음식을 보내는 게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택배가 뜸해지기 시작한 게 그즈음부터다.


“김지현!” 우리는 매일 통화했는데, 전화할 때마다 엄마는 어린 아이가 ‘엄마!’하고 부르는 것처럼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는 그날 자기가 칭찬받은 걸 신나서 자랑했다. 엄마는 자랑하길 좋아하는데, 자랑의 레퍼토리가 60세를 전후로 바뀌었다. 60 이전에는 자식 자랑을 했다. 그런데 정경화 남매처럼 될 줄 알고 유학 보낸 자식 셋이 유학을 다녀와서도 별 볼 일 없는 데다 남들 다하는 결혼도 못하고 늙어가는 걸 보고 실망해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더니 자식 자랑을 그만 두고 자기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자식 자랑에 비해 자기 자랑은 한결 들을 만했다. 


엄마는 40년간 해오던 미싱자수학원을 그만 둔 뒤 예순 넷에 사회교육원에서 도자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매일 집에 와서 수업시간에 교수와 동료 학생들이 자기 도자기를 칭찬해줬다고 자랑했다. 학교 사람들이 칭찬에 후한가보다 했다. 그런데 나중에 동료 학생에게 들으니 엄마를 칭찬해주지 않으면 수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엄마는 사회교육원을 졸업하고 나서 도자기를 제대로 해보겠다면서 천안에 집을 얻어 장작가마를 짓고 내려갔다. 집 바로 옆에 마을회관이 있었는데, 엄마는 도자기 덕분에 거기 앉아 할 일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걸 틈 날 때마다 다행스러워했다. 매일 도자기를 빚었고 몇 달에 한번씩 도자기를 구웠다. 술을 올리고 기도를 드린 뒤 가마에 장작을 넣으면 불길이 굴뚝 위로 사람 키만큼 치솟으며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와 지붕을 뒤덮었고 불자동차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출동했다. 세번의 개인전을 했다. 전시 오프닝은 결혼식장 분위기였다. 일가 친척을 비롯해 엄마와 친분이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와서 그릇을 사거나 봉투를 내밀었다. 자기 자식들 결혼식에 받기만 하고 되돌려주지 못한 부조금 대신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성황리에 개최된 전시가 엄마에게 두고두고 자랑할 거리를 제공했음은 물론이다. 


엄마의 또다른 자랑거리는 돌담 쌓기. 엄마는 개울에서 돌을 가져다 집 담을 쌓았는데, 할머니가 사방 50센티의 돌을 들어 담을 쌓는 광경을 본 이웃들은 차를 타고 가다가도 멈춰 서서 대단하시다며 감탄했고, 엄마는 나와 통화할 때마다 어느 집 아무개가 자기를 칭찬해줬다며 좋아했다. 


돌을 들어 나르고 왕복 5시간 거리의 서울을 사흘이 멀다고 오가는 건강이야 말로 엄마의 자랑이었다. “난 안 그런데.” 내가 어디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엄마는 말했다. 엄마는 나보다 33살이나 나이가 많음에도 나보다 건강했고 언제까지나 그럴 것 같았다. 그런데 80이 넘어가면서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 몸이 아프다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힘들어서 절에 못 가는 일이 생겼다. 우리 집에 오는 택배가 뜸해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다. 또 전에는 헷갈린 적 없는 것들을 헷갈리기 시작했는데, 5만원짜리 옷을 50만원짜리라고 했고, 요일을 착각해서 만나기로 한 날 전화를 해보면 집에서 전화를 받았다. 가장 곤란한 건 명랑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뭐 자랑할 게 있어야지.” 엄마는 전화할 때마다 시무룩한 음성으로 자랑거리가 없는 걸 비관했다. 


엄마는 치매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기운 빠지는 소리를 덜 했지만 몸은 계속 쇠약해졌다. 도자기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가마가 시원치 않고 손이 아파서 그릇을 못 만들겠다면서 나에게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마지막으로 나랑 영화 한번 만들어보자.”

“무슨 영화?”

“니가 하는 영화 내가 쫓아다니면서.”

“영화 만들면 엄마는 뭘 할 건데?”

“니가 가자는 데는 내가 어디든 운전해서 갈 수 있어. 마지막으로 엄마랑 좋은 영화 한번 만들어보자. 그러고서 엄마가 죽으면 기억에 남을 거 아니야. 꼭 부탁한다.”


학교 졸업하고 첫 영화를 엄마와 같이 만들었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촬영했고, 엔딩크레딧에 엄마는 운송으로 올라갔다. 그때처럼 같이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안 만든 지 오래고, 만든다 해도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촬영을 다니는 건 불가능했다. 


그 몇 년 전에 엄마 차를 타고 광주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여행 내내 다른 차들이 엄마 차를 향해 경적을 울려댔다. 고속도로에서는 뒤따라오는 차들이 너무 느리게 달리는 엄마 차를 추월하며 경적을 울렸고 광주 시내에 접어 든 뒤에도 뒤뚱거리는 차 주위에서 울리는 경적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엄마는 54에 운전을 시작했다. 필기시험에 두 번 떨어지고 독서실까지 끊어 열공을 한 끝에 운전면허를 땄는데, 운전하는 걸 좋아해서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운전대만 잡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학원을 그만두고 나서 택시운전을 하겠다고 티브이에 출연한 노인 일자리 모임 대표에게 이력서를 쓰기도 했다. 그 이력서를 보내지는 않았는데, 보냈더라도 택시운전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건 달라서 엄마는 운전을 잘 못했다. 나는 엄마의 서툰 운전실력을 놀리길 좋아했는데 이 여행에서는 정색을 하게 됐다. 엄마의 운전은 이제 단지 서툰 게 아니라 위험천만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에게 운전을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때마다 시골에선 차가 없으면 못 다닌다고 동네에서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천안IC에서 하이패스 차선으로 잘 못 들어가는 바람에 차선을 가로질렀다. “아유 어르신이 운전을 하세요? 앞차가 이 차가 운전을 위험하게 한다고. 고속도로에서는 젊은 사람이 운전을 해야 돼요.” 겨우 일반패스 차선을 찾아 들어갔을 때 통행료 징수원이 말했다. “개새끼. 지가 뭐라고.” 엄마가 창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엄마가 운전을 그만둔 건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양평으로 이사를 하면서다. 엄마가 약을 안 먹고 밥을 안 먹는 데다 자꾸 넘어지니까 혼자 둘 수가 없어서 언니가 엄마를 자기 집 근처로 이사시켰다. 그러면서 언니가 차를 가져갔는데, 엄마는 차를 뺐겼다고 했다. 언니가 차뿐 아니라 통장도 가져갔는데, 엄마는 통장을 뺏기던 날 산에 가서 엉엉 울었다고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라고 했다. 


양평으로 이사한 뒤 엄마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택배를 보낸다고 해서 내가 안 먹는다고 보내지 말라고 하면 정말로 안 보냈다. 전화도 자주 안 했다. 어쩌다 전화를 하면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피곤해서 누워야겠다면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볼 때마다 살이 무섭게 빠졌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통 먹질 않았다. 먹기 싫다, 못 먹겠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고, 내가 택배로 먹을 걸 보내면 안 먹는다고 다음부터 절대 보내지 말라고 당부 전화를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한테 밥 먹었냐, 반찬은 뭘 해서 먹었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김지현!”

엄마가 힘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침은 먹었어?”

내가 물었다.

“어?”

“아침 먹었냐고?”

“먹었어.” 

“뭐 먹었어?”

“어? 지금 밥 먹고 자고 있었어.” 

“그러니까 뭐 먹었냐고?”

“아침에 라면 먹고 어제 저녁은 안 먹고 그랬어.”

“라면 먹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네.”

“어?”

“말해봐야 소용없어.”

“어? 뭐라는지?”

“근데 귀가 점점 더 안 들리나 봐.”

“어? 귀는 잘 들려.”

“내가 이따가 갈게.”

“여기?”

“응.”

“오늘?”


집에 갔을 때 엄마는 마당에 있었다. 엎어 놓은 밥공기처럼 쭈그리고 앉은 뒷모습이 일주일 새 더 작아져 있었다. 엄마는 거꾸로 가는 시간 속의 벤자민 버튼처럼 볼 때마다 작아져서 이제 11살 아이만큼 작았다. 

“엄마!” 

큰 소리로 불렀지만 엄마는 듣지 못했다. 

“엄마!” 

가까이 다가가 큰 소리로 부르자 그제야 엄마가 고개를 돌렸다. 

“깜짝이야.”

“뭐해?”

“아유 깜짝이야, 놀라 자빠질 뻔했네.”

엄마가 손에 뽑은 풀을 한 웅큼 쥐고 일어났다.

“풀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밥 안 먹었지?”

“안 먹었지.” 

나는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게장 잘 해가지고 왔네. 게장이 먹고 싶었는데.”

엄마가 크고 살이 많은 등껍질은 놔두고 작고 가는 다리를 골라 들었다. 

“이걸 먹어.”

내가 등껍질을 주려고 하자 엄마가 손사레를 쳤다.

“이걸 먹으라니까.”

내가 엄마 그릇에 등껍질을 올려놓자 엄마가 진저리를 치며 그걸 도로 접시에 가져다 놓았다. 

“그게 덜 맛있어 이거 보다.”

엄마는 작고 가는 다리의 살을 바르며 말했다. 

나는 엄마가 다리를 좋아하는 줄 알고 살이 실하게 붙은 다리를 골라 엄마 밥 그릇에 놨다. 

“아니, 주지 마. 이렇게 고기가 많은 건 못 먹어.”

“왜?”

“고기가 조금 돼야지.”

“왜?”

“고기가 한꺼번에 입에 많이 들어가면 벅 차서.”

엄마는 조금이라도 큰 걸 먹으려고 욕심부리는 아이만큼이나 눈에 불을 켜고 작은 걸 골라 먹었다. 

“맛이 어때?”

내가 물었다.

“담근 지 얼마 안 됐나 봐. 안 익었어.” 

엄마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식당에서 왜 안 익은 걸 팔겠어.”

“간이 덜 든 거야 이렇게 하얀 거는.”

엄마가 밥을 반 공기도 안 먹고 숟가락을 놓았다.

“하나 더 먹어.”

“아니야, 못 먹어.”

“하나만 더 먹어.”

“못 먹어. 억지로 먹은 게 꿈에까지 막 나와 가지고.”

엄마가 손사레를 치며 식탁에서 일어섰다.


엄마와 같이 밥을 먹으려고 일주일에 한 번씩 양평에 갔다. 삼 주 째였다. 밥을 먹고 나면 근처 공원까지 같이 걸었다. “엄마가 매일 운동하러 간다는 공원에 한번 가보자.” 첫번째 주에 내가 말했을 때 엄마는 선뜻 일어섰다. 그런데 두번째 주에는 가자고 졸라야 했고, 이날은 못 일어난다고 버티는 걸 억지로 끌고 나가다시피 했다. 


“거기까지 가려면 너 밤 중에 집에 가야 되겠다. 내일 아침에 가.”

양쪽으로 차선이 하나씩 있는 도로를 걷기 시작하며 엄마가 말했다. 공원까지는 내 걸음으로 7분 거리였다.

“천천히 가.”

“혼자서는 가지도 못 해. 어제 가보려고 했더니 다섯 발 자국도 못 가겠더라. 자꾸 주저앉으려고 그러고.”

“잘 걷는데?”

“니가 뭐라고 할까 봐 겁나서.”

차도 사람도 없는 도로에 엄마의 신발 끄는 소리만 들렸다.

“맨날 누워만 있으면 어떡해.” 

“안 간 거 보다는 나을까?”

“가기 싫어서 그래?”

“너, 얼마나 힘든 지 모르지? 전신이 1500근이야 1500근. 내가 돌이라면 홱 던지면 저기 가서 떨어지고 또 홱 던지면 저기 가서 떨어지고 그러면 좋겠어.” 

첫 주에는 그 길을 중간에 한 번 쉬고 갔고, 둘째 주에는 네 번 쉬며 갔는데, 이날은 3-40 미터마다 한번씩 쉬며 갔다.


“저기 좀 앉았다 가.”

길가에 앉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엄마가 풀숲에 주저앉아 쉬는 동안 나는 옆에 서있었다.

“뼈다귀 같지?”

엄마가 소매 밖으로 드러난 자신의 팔을 보며 말했다.

“목욕을 하는데 내일 모레 죽을 개처럼 삐썩 마른 게 피부가 개가죽 같더라니까.”

“그러니까 사발면 먹지 마.”

“너는 팔도 두껍고 다리도 두껍고.”

엄마는 케이크를 먹고 몸이 작아진 앨리스가 거대한 탁자를 보고 놀라듯 나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누굴 닮은 건데.”

나의 두꺼운 팔과 다리는 엄마를 닮은 것이다. 나도 엄마 나이가 되면 살이 빠지겠구나 싶었다.  

“나는 갈비씬데.”

엄마가 말했고, 우리는 웃었다.

“또 가자. 저기 노란 줄 있는 데까지.”

엄마가 일으켜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어릴 때 이후로 엄마와 손을 잡고 걷는 건 처음이었다.


해가 기울어 길게 산그림자가 진 고구마 밭에서 한 남자가 이랑에 난 풀을 갈퀴로 긁어내고 있었다.

““땅마다 풀이 너무 많이 나와 가지고. 풀을 그걸로 매시니까 편하네요?”

엄마가 남자에게 소리쳤다. 나와 말할 때와는 달리 크고 싱싱한 목소리였다. 

“네, 운동 가시나 봐요.”

남자가 일을 멈추고 말했다.

“얘가 가보자고 그래서. 우리 둘째예요.”

“잘 다녀오세요.”

남자가 다시 갈퀴질을 했다.

“저렇게 일 잘하는 아바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아바이라고 일도 한번 안 하고.”

내가 초등학교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말하는 건지, 대학 다닐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살고 이래도 사네.”

엄마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듯 흥얼거리며 말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길갓집에서 백구 한 마리가 우리를 향해 짖고 있었다.

“쟤 봐. 반갑다고 얘기하는 거잖아.”

엄마가 반색하며 말했다.

“어디 갔었어? 아이구 예뻐라, 아이구 예뻐라.”

엄마가 백구에게 말했다.

“아는 애야?”

“맨날 저렇게 소리를 지르다가 안 보여서 누굴 줬나 그랬더니 다시 왔네.”

우리 뒤로 개 짖는 소리가 따라왔다.


우리는 노란 줄이 그려진 속도방지턱 앞에서 쉬었다가 다시 걸었다.

“얘는 부채가 달린 건가?”

엄마가 신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날개 달린 열매를 보고 물었다.

“씨를 멀리 날려보내려고 날개가 달린 거야.”

“나비 날개 같으네.”

몇 걸음 가니 바닥에 오디가 까맣게 떨어져 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이 떨어졌냐?”

엄마가 물었다.

“오디.”

“오디다, 야.”

몇 걸음 더 가니 바닥에 버찌가 까맣게 떨어져 있었다.

“이건?”

엄마가 물었다.

“이건 버찌.”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도로 쪽으로 낮게 드리워진 벚나무 가지에 버찌가 까맣게 달려 있었다. 하나 따서 먹어 보았다.

“달아!”

나는 잘 익은 버찌를 따서 엄마에게 줬다. 엄마는 안 먹겠다고 손사래 치치 않고 선뜻 받아 입에 넣었다.

“달지?”

“그러니까.” 

버찌를 몇 개 더 따서 엄마에게 줬다.

“이제 그만 줘. 내가 알아서 먹을 게.”

우리는 서로 다른 가지에 달라붙어 버찌를 따먹었다.

“이거 따서 잼 만들까?”

내가 말했다.

“달겠지? 이걸 다 따야 되는데 어떡하냐.”

엄마가 의욕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독립기념관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엄마는 전시관에서는 심드렁하다가 잔디밭에 떨어진 솔방울을 보더니 생기가 나서 그게 얼마나 좋은 땔감인지 모른다고 주워 가자고 하더니 차에서 자루란 자루를 다 가져다 솔방울을 비질하듯 쓸어 담았다. 다시 그런 날이 올까. 그러나 희미하게 되살아났던 불씨는 금세 도로 사그라들었고, 엄마는 버찌를 몇 개 먹다 말았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직 한참 가야지?”

엄마가 남의 집 계단에 앉아 쉬면서 말했다.

“못 가겠어?”

내가 물었다.

“갔다가 돌아갈래도 힘들지.”

“다 왔어.”

“다 왔어?”

“응.”

“가자.”

엄마가 일어섰다.

“짜증 나.”

엄마가 한두 걸음 가다가 구부정한 몸을 곧게 세우더니 파워워킹을 하는 것처럼 양팔을 크게 흔들며 말했다.

“뭐가?”

“내가. 짜증 나서 빨리 가려고.”

그러나 엄마는 몇 걸음 못 가서 도로 구부정하게 시들었다.  

“이렇게까지 뻗는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러니까 이제 사발면 먹지 마.”

“나는 그냥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어디 물에라도 텀벙 빠져서 헤엄치면서 죽을까?”

“헤엄 치면 못 죽지.”

“도대체 밤낮도 헤아리지 못하고 기운도 하나도 없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

“힘들면 돌아갈까?”

“가야지, 여기까지 와서.”

저만치 모퉁이에 전봇대가 보였다. 그 전봇대를 지나면 공원이었다. 

“거의 다 왔네. 저기 전봇대 있는 데서 좀 앉았다가 가.”

내가 말했다.


길가 공원엔 운동기구와 긴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엄마는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긴 의자에 누웠다. 바람이 왔다 갔다 하고 돌돌돌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개울 너머 산이 하얀 밤꽃에 뒤덮여 있었다.

“걸었다고 몸이 좀 가벼워졌어.”

엄마가 한참만에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밤꽃 냄새가 진동하지?”

내가 말했다.

“무슨 냄새가 나?”

“밤꽃, 밤꽃 냄새.”

“여기 어디 빵 만드는 데가 있나 봐?”

“빵 아니고 밤꽃.”

“아아.”

“저기 밤나무 꽃 핀 거 봐.”

“산에 밤나무가 하야네. 천안 같으면 내가 막 밤 주으러 다닐 건데.”

엄마는 가을이면 밤을 주워서 내게 몇 봉다리씩 보냈는데, 냉장고를 열면 뜯지도 않은 봉다리에서 밤벌레들이 기어나와 바닥에 허옇게 쌓여 있곤 했다.   

“오늘은 운동 기구 하지 마.”

“못 해.”

3주 전 공원에 처음 가던 날도 엄마는 도착하자마자 긴 의자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는데, 한참만에 일어나 운동기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의자에 앉아 머리 위의 손잡이를 잡아당겨 자기 몸무게를 들어올리는 팔 운동 기구였는데, 엄마는 의자에 앉더니 지푸라기 같은 팔로 자기 몸무게를 가볍게 10회나 들어올렸다. 기운이 없다 해도 돌을 번쩍번쩍 들던 가닥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 주에는 열 개를 채우지 못했고 이날은 운동기구를 하지 못했다.   

“어느새 이렇게 89세가 된 거야? 앞으로 살아봐야 2년도 못 살아……그럼 102살.” 

엄마는 중간에 한참이나 말을 멈추었는데, 왜 그러나 했더니 속으로 89 더하기 2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헛소리하는 것 좀 봐. 102살이 아니라 92살이야.”

숫자 계산에 어려움이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89 더하기 2가 정말 92인 줄 알았다. 

“우리 집안에 92살에 죽은 사람이 있냐?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아버지도 그렇고 오촌도 102살까지 못 살았지.”

“92살이라니까.”

“우리 엄마처럼 그렇게 갑석하게 죽으면 얼마나 좋아……우리 엄마는 초저녁에 할머니 옆에서 잔다고 발발 가가지고 조금 있다 보니까 죽었다는 거야……할머니가 나를 깨워서 어미가 죽었다 그래서 보니까 숨을 안 쉬어. ‘어머니 옆에서 잘 게요’ 하고는 구차한 얘기도 없이 10분 만에 죽은 거야……내가 그때 한……11살 때였는데, 엄마 죽고 나서 금방 꿈을 꿨는데 엄마가 죽을 적에 입었던 하얀 옷을 입고 벽장 위로 올라가는 거야. 아유 그래 내가 엄마 어디 갔었냐고 나도 따라 간다 그랬더니……연필 한 다스 하고 노트 한 권을 주면서 이거 가지고 공부 잘하라고. 근데 뭐 공부를 잘할 여건이 됐냐. 그래도 끝까지……끝까지 그 어려운 걸 놓지 않고, 그러니까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원을 육십 몇 살까지 했겠지.”

엄마가 수없이 되풀이한 이야기가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졌다. 

“갈까?”

내가 말했다.

“운동을 하고 가니까 좀 나을까, 안 한 거 보다?”

“집에 가서 자.” 

“가자.”


어느 집 앞을 지나는데 조명이 켜졌다.

“우리 왔다고 켜지나?”

“자동이야.

해가 저물면서 도로에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저 아주머니는 얼마나 걸음이 가볍니. 나도 저렇게 걸은 적이 있을까?”

엄마가 앞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보면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걸으세요?”

여자가 가까이 오자 엄마가 소리쳤다. 

여자가 무슨 소리인지 몰라 엄마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걷느냐고요?”

여자가 웃으며 멀어졌다.


“운동 다녀오세요?”

마을 입구 정자에서 앞집 할머니가 인사했다.

“얘가 가자 그래서. 갔다 오는 데 두 시간도 더 걸렸어요.”

엄마가 말했다.

“두시간까지는 아니고 한 시간 걸렸어요.”

내가 정정했다.

“우리 둘째예요.”

“따님이시구나.”

“안녕하세요.”

“들어가세요.”


엄마는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원추리 앞에 쭈그려 앉았다. 박주가리 덩굴이 원추리 꽃대를 타고 올라가 봉오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금방 이렇게 감아가지고서.”

엄마가 조심스럽게 덩굴을 풀었다. 또 다른 덩굴이 그 옆의 원추리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앉지도 않고 서서 그 덩굴을 잡아당겼다. 덩굴과 함께 원추리가 휘어졌다. 

“야야야 이거 다치면 안 되잖아.”

엄마가 소리쳤다. 나는 모른 척하고 덩굴을 계속 잡아당겼는데, 원추리는 놔두고 덩굴 혼자 뚝 끊어졌다. 

“아이고 왜 이럴까?”

엄마는 엎어 논 밥공기처럼 쭈그리고 앉아 덩굴을 마저 풀었다.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양평에 갔는데, 엄마는 아무리 졸라도 밖에 나가지 않고 갓난아이처럼 잠만 잤다. 엄마가 자는 동안 원추리는 주황색 꽃을 피웠고, 덩굴은 다시 원추리를 칭칭 감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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