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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Sep 21. 2023

카눈

송탄, 천안을 거쳐 분당 소영의 집에 갔다. 거기서 태풍 카눈 소식을 들었다. 다음 행선지를 못 정하다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동해에 가기로 했다. 해마다 태풍철이면 우비로 무장한 기자들이 비바람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똑바로 서지도 못한 채 휘청대며 태풍속보를 전한다. 그 뉴스를 볼 때마다 그런 특별한 현장에 있는 기자들이 부러웠다. 마침 여행 중이니 나도 태풍이 부는 바다에 가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소영의 아파트를 나섰다. 날씨가 달라져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어찌나 해가 뜨거운 지 지붕 밖으로 나갈 때마다 달군 프라이팬에 올려진 새우처럼 아 뜨거 소리가 절로 났는데, 먹구름이 드리운 거리는 한결 다닐 만했다. 


동해 행 고속버스에는 승객이 두 명 밖에 되지 않았다. 평창을 지나며 버스 앞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안개 때문이었다. 안개 사이로 바로 앞차의 뒤꽁무니만 겨우 보였다. 버스가 차선을 바꿀 때마다 뒤에서 오는 차가 우리 차를 못 보고 들이받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동해행을 결심한 뒤로 50대 여성이 바다에서 실종됐다는 뉴스가 머리속에서 맴돌았는데, 바다에 가보지도 못하고 뉴스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고지대를 벗어나자 비가 그치면서 안개가 걷혔다. 


동해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니 현영의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동해안의 여러 도시 중에서 동해에 간 건 현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현영과는 지난해 예술강사 연수에서 만났다. 

“동해는 처음이시죠?”

현영이 운전을 하면서 물었다.

“아니, 여러 번 왔어. 맨 처음 온 건 학력고사 끝나고 친구들하고 무전여행으로. 무전여행이 뭔지 알아?”

“무전기를 가지고 다니는 건가요?”

“군사작전하냐? 무전기를 갖고 다니게? 없을 무. 돈 전. 돈 없이 하는 여행이라는 뜻이야.”

우리는 같이 웃었다.

“그때 우리가 바닷가만 찾아다녔으니까 얼마나 많은 바다를 봤겠냐. 근데 바다가 나올 때마다 ‘바다다’하고 뛰는 거야. 자기도 바다를 보고 ‘바다다’하고 뛴 적 있어?”

“아니요. 저는 늘 바다를 보니까.”

“그렇구나.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바다다’하는 그 마음을 모르는구나.”

“저는 외지에 갔다 와서 바다를 보면 고향에 온 거 같아요. 바다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를 맡아도 그렇고.”


현영이 묵호항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니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쳤다.

“저기가 곰치회를 제일 잘하는 집이래요.”

현영이 횟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횟집 수족관에는 덩치가 큰 시커먼 물고기들이 있었다. 곰치였다. 

“우리 친구들은 동해에 온 손님한테는 무조건 곰치국을 대접해야 한다고 그래요.” 

현영이 곰치국을 시켰다. 수족관의 곰치는 피부가 탄탄하지 않고 바람 빠진 풍선 같아 살이 흐물흐물할 것 같았는데, 먹어보니 생긴 것과 식감이 일치했다. “우리 아빠가 곰치국 먹을 땐 콧물 삼키듯 삼키라고.” 내가 국 그릇에 길게 떠다니는 살덩이를 숟가락으로 떠서 후르륵 삼키자 현영이 말했다. 입안에서 미끈거리는 것이 정확하게 그 느낌이라 비위가 상했지만, 맛있었다. 


어떤 곳에 숙소를 잡아야 태풍을 가장 잘 볼 수 있을까. 횟집 건너편에는 6층짜리 모텔이 있었다. 다른 음식점과 숙소는 해안도로를 따라 육지 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 모텔 홀로 도로 저쪽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태풍을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어쩌면 더 나은 곳이 있지 않을까. 내가 망설이자 현영이 망상해수욕장에도 가보자며 차를 몰았다. 묵호항은 항구와 방파제로 둘러싸여 변변한 백사장이 없었던 데 반해 망상해수욕장에는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백사장이 넓다 보니 해안도로에서 바다까지 거리가 너무 멀었다. 파도가 높아져 해수욕장 입구를 막아버리면 바다가 대형공연장의 가수처럼 손톱 만하게 보일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촛대바위에 가보실래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어디야? 비 오는데 빨리 들어와야지. 빗길에 운전하면 위험해서 안 돼.”

스피커폰으로 현영의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요. 조심해서 들어 갈게요.” 

현영이 전화를 끊었다.

“빨리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우리 집 통금은 12시예요.” 

차창 밖으로 줄곧 낮은 건물이 이어지다가 높은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둑해진 거리에서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여기가 시내야?”

“네. 친구들하고 약속하면 여기서 만나요.”

“스타벅스가 있네.”

“저쪽에 하나 더 있어요.”

“거리가 아담하니 예쁘네.”

“근데 금방 끝나요.”

한 블록을 지나자 거리는 도로 어두워졌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차 한 잔 하실래요?”

“좋아.”

우리는 카페에서 비가 잦아들길 기다리기로 했다. 

어두운 골목에 카페 하나만 불이 켜 있었다. 차에서 내려 그곳으로 뛰어들어갔다. 거기 있는 한시간 동안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거리엔 오가는 사람조차 없고,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 

“더 늦기 전에 가는 게 낫겠어.”


밖으로 나오자 비가 포탄처럼 쏟아졌고, 우리는 참호를 향해 달리는 병사들처럼 머리를 낮춘 채 전속력으로 달려 차에 올랐다.  

“촛대바위 쪽으로 가시겠어요?”

현영이 스마트폰에 도착지를 입력하면서 말했다.

“여기서 가깝다고 했지?”

“네. 우리 집하고도 가까워요.”

“그래, 그리로 가자.”

현영을 더 끌고 다니면 안 될 것 같아 어디든 가까운 곳에 가기로 했다.

차가 출발했다.

“비 오는 날 운전해 본 적 있어?”

“네.”

“이렇게 비가 많이 올 때도?”

“아니요. 이런 건 처음이예요.”

현영은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된 초보 운전자였다.

“괜찮겠어?”

“괜찮아요. 30킬로로 천천히 가고 있어요.” 

현영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는 현영의 주의를 흩뜨릴까 봐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와이퍼 소리만 들렸다. 와이퍼 속도가 점점 빨라졌지만, 와이퍼는 쏟아지는 비를 미처 닦아내지 못했다. 도로는 강으로 변했고 현영은 시커먼 강물을 가로질러 추암 해변이라고 쓴 굴다리 앞에 나를 내려줬다. 

“괜찮으시겠어요?”

현영이 자기 우산을 건네며 말했다.

“괜찮아. 조심해서 가.”

우리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헤어지는 전우들처럼 비장하게 헤어졌다.


굴다리 앞에 펜션이 있었지만, 거기까지 가서 바다가 보이지도 않는 숙소에 묵을 수는 없었다. 굴다리 안으로 들어갔다. 굴다리를 지나자 주차장이 나오고 그 너머가 바다였다. 바다 위에 촛대처럼 솟은 촛대바위가 보였다. 그 앞으로 상가가 이어졌는데, 네이버 지도에 따르면 그 안에 민박집이 있었다. 자꾸 뒤집히는 우산을 접어들고 아무도 없는 상가를 돌았지만, 문을 연 곳도 숙박업소 간판이 붙어있는 곳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굴다리를 나와 굴다리 앞 펜션에 묵었다. 


다음 날 새벽 다시 바닷가에 가보았다.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추암 해변은 손바닥만 한 백사장을 둘러싸고 횟집들이 늘어서 있는 작은 해수욕장이었다.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었고 가게들도 문을 열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곳은 태풍을 관찰하거나 하루를 보내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택시를 불러 묵호항으로 갔다. 묵호항에 내리자마자 우산이 뒤집혀 가게에 들어가 우비를 샀다. 삼천 원짜리 우비는 비닐이 너무 얇다 했더니 입기도 전에 찢어졌다. 새 걸로 바꿨지만 그것도 몇 걸음 못 가 찢어져 왼쪽 허벅지가 축축해졌다. 아무 데나 가까운 숙소에 들어가기로 했다. 호텔이라고 간판을 붙인 모텔로 들어갔다. 극장 매표소처럼 생긴 카운터의 창문이 닫혀 있어서 벨을 눌렀더니 중년 여자가 자다 깬 얼굴로 창문을 열었다. “방 있어요?” 내가 우비를 입은 채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물었다. “여긴 비싸요.” 여자가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네?” “여긴 비싸요. 저 위로 가면 4, 5만원이면 될 거예요.” 여자가 창문을 닫았다.


모텔을 나와 걷다 보니 전날 곰치국을 먹었던 횟집이었다. 9시가 안 된 시간인데도 불이 켜져 있어서 안으로 들어 가니 일하는 사람 셋이 모여 앉아 있다가 나를 쳐다봤다. “식사 되나요?” “네, 앉으세요.” 우비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 앉았다. “이 빗속에 여행을 오셨어요?” 종업원이 물을 갖다주며 말했다. “그러게요.” 먹었던 걸 또 먹고 싶지 않아서 회덮밥을 시켰다. 시키고 나서 아침부터 회덮밥은 좀 아니다 싶었는데, 정말 그랬다. 밥을 먹고 나서 빗속에 나갈 엄두가 안 나 앉아서 티브이를 보는데, 태풍속보를 했다. 기상 캐스터가 태풍의 경로를 시간대별로 알려줬다. 그 시각 카눈이 경남 남해안 부근으로 상륙하고 있었다. 선녀의 날개 옷 같은 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카눈의 모습이 떠올랐다. 멀고 만 남해에서 그 옷자락이 일으키는 바람이 식당 문밖에 비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식당에서 나와 그곳에서 대각선으로 30미터 떨어진 ‘꿈의 궁전 호텔’로 향했다. 전날 봐 둔 바다 위에 서있는 바로 그 모텔이었다. 비바람을 뚫고 모텔 현관 앞에 도착했지만, 자동문이 열리지 않았다. 담뱃불을 붙이는 것처럼 비바람을 등지고 벽에 달라붙어 전화번호를 눌렀더니 안에서 모텔주인이 나왔다. “문이 고장 나서.” 모텔주인이 문 사이에 양 손가락을 넣어 자동문을 열면서 말했다. 7만원을 내고 방 열쇠를 받아 3층으로 올라갔는데 방문도 안 열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모텔 주인이 올라와 방문을 열어줬다. 방 한 면이 유리로 돼 있었는데, 내려다보니 발 아래 바위 사이로 파도가 휘몰아쳤다.  


지하에 해수 사우나가 있다고 해서 내려갔다. 탕이 있는 벽면이 유리로 돼 있었는데, 뿌옇게 서린 김을 닦으니 방에서 내려다보았던 바위가 눈 높이로 보였다. 탕에 앉아 도로 뿌예지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파도가 유리를 때리고 가면 파도가 남겨 놓은 빨간 해초 조각이 유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목욕을 하고 1층에 올라가니 모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 물을 펐다. 살펴보니 창틀에서 물이 줄줄 새고 문 틈으로 물이 들어와 바닥의 낮은 쪽이 물에 잠겨 있었다. 어수선한 로비의 소파에 앉아 통 유리 밖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시각 동해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비가 내리고 파도가 7미터까지 치솟았지만 유리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평소와 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태풍에 180도 돌변하는 우리 동네 성북천과 비교하면 더 그랬다. 성북천은 평소에는 바닥이나 겨우 적실 정도의 물이 무료하게 흐르지만, 태풍에는 물이 도로 밖으로 넘칠 것처럼 불어나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면서 무서운 속도로 쏟아지고, 주변의 나무와 풀은 덩달아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어댄다.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의 왜소한 박사가 옷이 갈가리 찢기며 근육질의 헐크가 되는 것만큼이나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에선 아무리 많은 비도 바닷물에 물 몇 바가지 더하는 것과 별 다르지 않았고 집채만 한 파도도 거대한 바다를 배경으로 보면 고만고만한 파도들 중 하나였다.   


일하는 사람들 틈에 멀뚱히 앉아 있기가 뭐해서 밖으로 나갔다. 가드레일 앞에서 테트라포트를 넘어오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파도에 붉은 기가 돌아서 자세히 보니 그 안에 빨간 해초가 잔뜩 섞여 있었다. 해수탕 유리에 붙어있던 그 해초였다. 빨간 해초를 품고 뒤집히는 바다는 해초주스를 만드는 믹서 같았다. 도로에 바다가 뱉아낸 해초가 빨갛게 뭉쳐 다녔다. 거기에 가끔 팔뚝만 한 물고기도 섞여 있었다. 


태풍으로 배나 비행기가 못 떠서 행락객들이 오도가도 못한 채 고립됐다는 뉴스를 보면서 나도 한번쯤 그런 상황에 처해봤으면 했다. 왠지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비슷한 처지가 돼 보니 할 게 없었다. 방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12시가 되자마자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그나마 밥 먹는 게 유일한 할 거리였다. 비바람을 뚫고 아침에 갔던 횟집의 옆 횟집에 갔다. 식당은 달랐지만 차림표의 메뉴는 똑같았다. 한번씩 먹은 곰치국과 회덮밥을 빼고 나니 1인분을 시킬 수 있는 메뉴가 생선구이와 물회 뿐이었다. 회자 들어가는 걸 연달아 먹기가 그래서 생선구이를 시켰더니, 접시 밖으로 삐져 나갈 만큼 큰 생선이 세 마리 나왔다. 

“이걸 다 어떻게 먹어요?”

내가 말했다.

“여기선 원래 이렇게 나와요.”

종업원이 대답했다.

“이게 다 여기 바다에서 잡은 거예요?”

“아니요. 가운데 해뜨기만 여기서 잡은 거예요.”

“해뜨기요?”

“네, 해뜨기.”

해뜨기를 포함한 생선은 크기만 크지 맛은 별로였다. 젓가락으로 생선을 깨작거리는데, 문이 열리며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은 모습으로 뭐가 좋은 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곰치국 주세요.”

청년은 젖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우산도 없이 다니세요?” 

종업원이 수건을 가지고 와서 청년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런 날씨엔 우산 써도 어차피 다 젖으니까요.” 

“태풍에 여행을 오셨어요?” 

“태풍 온다 그래서 그런 거 좋아해서 온 거예요.”

“어, 나돈데.” 

내가 끼어들어 말했다.

“언제 오신 거예요?”

종업원이 남자에게 물었다.

“어제 저녁에 와서 저기 꿈의 궁전에서 잤어요.”

“어, 나돈데.”

내가 말했다. 

“저는 306호에요.”

“어머, 나는 305혼데.”

“제가 저분 나이 또래의 친구가 있는데.”

그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친구가 태풍 올 때 동해에 꼭 가봐야 된다고 해서 월차 내고 온 거예요.”

“젊을 땐 이런 것도 다 추억이죠.”

종업원이 말했다.

청년과 나는 공통점이 많았지만 할 말은 많지 않았다. 어디서 왔고 언제 갈 거라는 등의 말이 오다가 얘기가 끊겼다. 영화에는 고립된 상황에 처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가 많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티브이를 보는 대신 그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화장실에 다녀오니 그는 나가고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빗줄기가 잦아들어 있었고 아침과 달리 흙색으로 변한 파도는 더는 해초를 뱉아내지 않았다. “거기 계시면 안 됩니다.” 가드레일에 붙어 파도를 구경하는데 경찰차가 다가오며 확성기로 경고했다. 가드레일에서 멀어졌다가 경찰차가 지나가는 걸 보고 가드레일로 다가가면서 머릿속에서 뉴스 화면이 지나갔다. ‘50대 여성이 동해의 해안도로에서 파도에 휩쓸려 숨졌습니다. 경찰이 여러 차례 위험을 알렸는데도….’ 모텔로 돌아가는데, 저만치 306호 청년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티브이를 보다가 6시에 방을 나섰다. 모텔 로비에서 밖을 내다보니 비가 그쳤는데도 도로에 물방울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가드레일을 넘어온 파도였다. 파도를 맞으려고 우비 똑딱이를 채우고 모텔을 나섰다. “그쪽은 위험해요.” 가드레일로 다가가는데, 뒤에서 모텔 주인이 소리쳤다. 가드레일에서 멀어졌다가 모퉁이를 돌아 모텔주인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가드레일로 다가갔다. 빠르게 달려와 눈앞에서 부서지는 파도는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높은 파도가 치면 누가 다라이로 물을 끼얹는 것처럼 도로로 물이 확 찌끄려졌는데, 등을 돌려 그걸 맞으면 파도와 인디언밥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거기 계시면 안 됩니다.” 파도와 놀면서 걷는데 또 경찰차가 나타났다. 해안도로를 따라 경찰들이 드문드문 경비를 서고 있었다. 같이 놀면서도 파도가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경찰이 가까이 있으니 엄마 옆에서 노는 아이처럼 안심됐다. 


수백 미터에 걸쳐 이어지는 방파제 위로 파도가 춤추는 분수가 되어 솟구쳤다. 경쾌하고 박력 있는 군무에 덩달아 신이 나 파도를 쫓아다니는데, 잿빛 구름이 길게 찢어지며 에머랄드빛 하늘이 드러났다. 카눈이 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갔나 봐요.” 나는 마주친 경찰에게 소리쳤다.


저녁은 생선이 아닌 다른 메뉴를 먹고 싶었는데, 해안도로를 따라 수십개의 식당이 전부 다 횟집이었다. 비가 그친 식당엔 손님이 많았다. 일인분을 시킬 수 있는 마지막 메뉴 물회를 먹고 입이 비릿해서 식당을 나왔다. 모텔로 돌아가는데, 튼튼한 우비를 입고 한 손에 두툼한 방수 마이크를 든 기자가 카메라 기자와 같이 지나갔다.  


“나오실래요?” 방에 있는데 현영의 전화가 왔다. “좋아.” 나는 냉큼 대답했다. 현영의 차를 타고 습지에 갔다. 깜깜한 습지에서 올려다본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하루만에 딴 세상이 됐네.” “그러게요.” 걷다 보니 연잎으로 가득 찬 연못이었다. “저기 침 뱉으면 재밌어요.” 현영이 침을 뱉자 구슬이 된 침이 연 잎 위를 또르르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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