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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아 Mar 05. 2024

시작은 평범했다




"임신 5주 차 정도 되었네요 축하드립니다."



의사 선생님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 작은 동네의 산부인과 안은 세월의 흔적은 있었지만 그래서 아늑했다. 분홍색인지 오렌지빛인지 모를 커튼이 반쯤 창문을 가려져 있고, 햇빛이 창가로 조금씩 새어 나왔다. 편과 나는 초음파 사진이 끼워진 산모 수첩을 얼떨결에 받고 건물 아래로 나왔다. 둘은 눈을 마주치자마자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눈에서는 습긴지 눈물인지 모를 물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 임신이야 으허허허헝" 울다가 웃다가 부둥켜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 누군가 그 장면을 봤다면 월드컵에서 골이라도 넣어 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내 배 속 아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렇게나 울면서 아기를 맞았다면 난임 부부였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임신 준비 4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왔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출산하고 몇년 뒤, 건강검진에서 나는 오래전 부터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 있었고, 이것은 난임 확률이 높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임신 사실을 알기 전날, 크리스마스 겸 연말 여행을 하고 있었다. 빨간색 맨투맨을 입고, 들떠 강원도 스키장에 도착했다. 리프트를 타고 가는데 이상했다. 고소 공포증은커녕 높고 빠른 놀이기구를 편안하게 타던 내가 속이 울렁거리고 아래를 자꾸 쳐다보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스키를 타는 것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와 쌀국수를 먹는데, 소고기 양지에서 알 수 없는 비린 맛이 나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보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신기하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꺼렸다.

그렇게 여행하다가 어느날 아침 잘 알지 못하는 작은 의원에서 임신 확인을 받았다.

동해시의 작은 병원, 의사 선생님과 낡은 기구들을 떠올리면 오래된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떠올리는 기분에 휩싸인다.





2


주변에서 모두 많은 축하를 받았다.

가끔 지하철 타면 천사 같은 분들이 나타나 자리를 꼭 양보해 주셨다. 새삼 모두가 아기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느껴져 왠지 마음이 가득 채워졌다.

초기 입덧에 한 달 내내 누워 있었다. 배 타고 세계 일주를 하는데 뱃멀미가 심한 이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누워서 응답하라 1988을 눈에 겨우 넣으며 남편을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종일 먹을 수 있는 것은 귤 몇 조각과 참 크래커 몇 개뿐. 살이 쑥쑥 빠지고 근육도 쭉쭉 빠져내려 갔다.

어느날은 집에서 선물 받은 홍어를 먹기 위해 남편은 베란다로 나가 상을 차려 먹었다. 샷시 문 사이로 우리는 웃었다.


기다림은 참 길었다.

하루하루 아기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까. 목소리를 어떨까. 커서 어떤 걸 좋아할까. 모든 게 기대로 찼다. 낳기만 하면 펼쳐질 아름다운 날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때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 "STAY"



퉁퉁부운 발을 내려다보고 그 앞에 불뚝 솟은 배의 태동을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아들 배가 아니냐고 누군가 물었다. 그만큼 배는 하루가 다르게 더 커져갔다.  살이 트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뱃 속에 아기가 더 넓은 방을 갖게 된 것 같아 벌써부터 뿌듯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이미 내 몸은 걸어다니는 아기의 집 그 자체.



시작은 아주 평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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