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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영 Feb 17. 2022

다가오는 봄과 식물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1.

성격이 급한 사람은 여운이 남는 순간에도 무언가를 하고 싶다. 이야기가 가져다준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여 노트북 자판 위에 손을 얹는다. 고성에서 한달살기를 하며 15권 넘게 책을 읽었다. (물론 대부분은 부족한 끈기 때문에 절반밖에 읽지 못한 책이다.) 서평을 남기고 싶은 책이 종종 있었지만 시험 공부를 핑계로 미뤘다. 하지만 오늘 읽은 책 <지구 끝의 온실>은 소설 속 풍경과 인물의 이야기를 조금 더 곱씹어보게 만든다.


2.

김초엽 작가님의 장편 소설을 접하게 되어 행복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었을 땐 중단편 소설들이 모아져 있어 아쉬움이 컸다. 고성에 놀러 온 친한 언니가 이 책을 선물해주어 우연찮게 접할 수 있었다. 


SF소설을 처음 접한 것도 작가님의 책이었다. 누군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얘기했던 때가 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만큼 재밌는 책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작가님의 책들이 개성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나서 더욱 느꼈다. SF 중에서도 일종의 아포칼립스 소설이지만 최근 젊은 여성 작가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시선이 녹아들어 있다. 액자식 소설처럼 멸망을 겪고 재건된 세상의 이야기와 멸망했던 과거 시대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재건된 현실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도덕성을 논하는 시위 장면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에 대한 레비의 '회색지대' 이론이 떠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탈인간중심주의적 사고다. 그중에서도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식물'의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의 식물종이 번영한다는 것이 그 종의 터전을 넓혀가는 일이라면, 모스바나는 한때 지구 상의 생물로는 유례없는 번영을 누렸습니다. 인간들이 돔 안에 갇혀 죽어갈 때 모스바나는 인간이 가본 적 없는 지역까지 번성한 우점종이었지요. 그리고 그 영광의 시대가 끝났을 때, 모스바나는 기꺼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인간이 우점종으로서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동물에 대한 윤리학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얘기되는 전제가 고통을 느끼는 유무다. 윤리학의 '윤'자도 모르지만 언젠가 고통보다 더 포괄적인 기준이 생명체를 대하는 보편적 도덕성의 전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평범한 감수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상상해본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식물이더라도 생명력을 지닌 식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현재 우리가 동물 실험을 바라보는 관점처럼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거시적인 교훈만 있지 않다. 과거 시대의 주인공인 기계 수리공 '지수'와 사이보그인 '레이첼'의 이야기는 소설 마지막 즈음에 독자를 울컥하게 만든다. 자신도 파악하지 못한 감정과 호기심에 레이첼의 감정 통제 능력을 바꾼 지수는 레이첼과 예상치 못한 관계에 접어들게 된다. 마치 시간여행 속 엇갈린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안타까웠다.


4. 

어제 책을 선물해준 언니를 터미널에서 배웅해주기 위해 같이 택시를 타고 속초로 가고 있었다. 바깥 풍경을 구경하던 중 도로와 인도 사이 쳐진 펜스 사이로 샛노란 꽃들이 피어있었다. 개나리로 보였다. 


"언니 벌써 개나리 피었어!"


"에이 설마, 진짜?"


날씨는 맑았지만 거센 바람을 맞으며 같이 택시를 기다렸던 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개나리를 봄에 피는 꽃으로만 알고 있지, 정확히 언제 피는지 알 리가 없는 도시 촌녀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벌써 봄이 온 걸까. 아니면 소설 속 주인공이 어릴 적 신비로운 푸른빛을 내던 모스바나를 봤듯 나름의 신기루였을까. 삭막한 개강 시즌이 돌아오지만, 매년 그렇듯 봄에 필 꽃과 나뭇잎들이 보여줄 풍경을 상상하니 기분 좋은 설렘도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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