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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베이커 Oct 15. 2023

[MEET] 박서보

나를 비워 만든 단색화가 가진 치유의 힘

[MEET] 박서보 © 2023. ART BAKER




01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별세

RIP Park Seo-Bo, Korean Dansaekhwa Master


© SEOBO ART FOUNDATION


10월 14일 오전,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Park Seo-Bo, b.1931-2023) 화백향년 92세로 별세하였습니다.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이후에도 새로운 전시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간직한 채 끝까지 작업에 전념했던 박서보 작가의 뜻을 기리고자 합니다. 함께한 날들과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은 영원히 우리의 곁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예술가이자 교육자로서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며 이 시대의 큰 귀감이 되어주었던 작가님의 외롭고 고단했을 시간에 깊은 감사와 심심한 위로의 말씀 전합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인스타그램 포스팅 속 글이 먹먹함을 더합니다.


하루 사이 바람의 결이 바뀌었다. 가을인가. 바닷 바위에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도 사뭇 차가워지고. 내년에도 이 바람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02 기존 미술계를 향한 거침없는 저항

Challenging Kukjeon Artist's Artistic Conscious and Perspective of Society


© SEOBO ART FOUNDATION


박서보는 날카로운 호기심을 가지고 지칠 줄 모르는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지난 70여 년간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1954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박서보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의 고난을 극복하며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작가는 1956년, <4인전>을 통해 반국전 선언(Anti-Kukjeon Declaration)을 발표해 기존의 보수적인 한국미술계에 저항하며 본격적인 미술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하고, 또한 변하면 추락한다.


1950년대 후반 전위적인 예술운동을 펼치며 기존 예술체제에 반(反)하는 프랑스의 앵포르멜(informel) 운동에 앞장섰으며,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 초반 원형질(原形質) 연작을 발표했습니다. 두꺼운 마띠에르와 비형상주의를 자처하던 앵포르멜의 경향에 몰두하던 작가는 차가운 기하학적 형태에 주목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허상(虛像) 연작을 통해 현대인의 번잡스러운 형상을 다루었습니다.




03 지우고 비워내는 수행의 연속


Park Seo-Bo, Écriture (描法) No.6-67,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30x200cm, 2014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로 넘어오며 박서보는 기존의 추상 계열 화풍에서 벗어나 '탈 이미지'로 새로운 전환을 선보였습니다. 박서보는 최초의 '연필 묘법' 작품 <묘법 No. 6-67>을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된 작품"이라고 꼽았습니다. 박서보의 묘법 회화는 박서보의 둘째 아들이 네모 칸 안에 글자를 쓰고 연필로 마구 휘갈기며 지우는 것을 보는 것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습니다. <묘법(猫法, Écriture)>은 회화에서 형상을 제거하는 동시에 회화의 근본적인 의미에 주목하며 '어떻게 그릴 것이냐'라는 물음 끝의 결과였습니다.


Park Seo-Bo, Ecriture No. 37-75-76, oil and pencil on canvas, 195 x 300 cm,  1975-76 © Park Seo-Bo


1975년도에 제작된 <묘법 No. 37-75-76>은 마포에 회백색의 유화 물감을 칠한 후 물감이 다 마르기 전에 일종의 수행을 하듯 연속적으로 선을 무한히 긋는 작업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규칙적 반복 행위의 궤적이 담긴 연필선을 따라 화면 위의 물감이 걷히고, 굳지 않은 물감이 밀려 만들어진 획의 모양은 태도와 행위가 하나로 만나는 귀중한 지점입니다. 지우고 비우는 행위의 반복 자체가 남긴 결과물에는 작가의 수행적 태도와 구도와 비움의 미학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2023년 10월 홍콩 소더비 경매(Sotheby's Hong Kong Contemporary Evening Auction)에서 약 35억 원(HKD 20,415,000 Premium)에 판매되며 작가 경매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경매에 출품된 박서보 작가의 작품 중 두 번째로 큰 사이즈로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Écriture (描法) No.890530-3,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300.5 x 228 cm, 1989


'단색화의 핵심은 색이 아닌 정신'이라고 박서보는 이야기했습니다. 단색화는 행위의 무목적성, 행위의 무한반복성, 행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성의 정신화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서예의 필법을 연상시키는 독창적인 평면 회화를 시도한 작가는 화면 가득 펼쳐진 패턴을 활용하여 화면 안에 작가의 반복적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비워냈습니다. '그림이란 화면에 생각을 채우는 장이 아닌 비워 내는 마당'이라는 사유로 탄생한 <묘법>은 인간 중심적이며 개념에서 출발하는 서양의 모노크롬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며 '단색화(Dansaekhwa, monochrome painting)'로 한국 근대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Park Seo-Bo’s atelier at Hapjung-dong, Seoul, 1977 via sothebys.com Courtesy of the artist




04 화려한 단색화로 전하는 위로


Park Seo-Bo, Écriture (描法) No.071208,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80x300cm, 2007
Park Seo-Bo, Écriture (描法) No.140410,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30x200cm, 2014
Park Seo-Bo, Écriture (描法) No.080206,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65x260cm, 2008


21세기 들어서 전환기를 맞이한 묘법 연작은 색채 체계에서의 큰 변화가 두드러집니다. 자연과 일상의 아름다운 색 조화에서 영감을 받은 박서보는 색을 치유의 요소로 여기게 됩니다.


단풍이 태양과 직렬된 전면에서는 형광 빨강을 발라놓은 것 같아요. 바람이 불면 한쪽은 형광 빨강인데 또 한쪽은 거무튀튀하죠. 바람, 태양과의 관계에 의한 자연의 조화로 내 빨간색이 탄생했어요. 감정의 잔파동을 표현할 줄 알아야 예술가죠. 아크릴 등 수성은 제가 갠대로, 바른대로 보이질 않아요. 말라봐야 그 진짜 색을 알 수 있죠.


예술은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 고통받는 현대인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작가의 다짐이 작품의 다채로운 색에서 확인됩니다. 작가가 온몸을 바쳐 자신을 비워내 탄생한 작품에는 대중을 치유하는 힘이 느껴집니다.


Park Seo-Bo, Écriture No.130808, mixed media with Korean paper on canvas, 130 x 200 cm, 2013


붉은색의 <묘법>은 타오르는 듯 강렬한 붉은빛을 머금은 듯이 보이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한지와 수성 안료를 사용하여 제작된 묘법 연작에는 물기를 머금은 한지 위를 연필이나 나무 주걱 등의 도구로 긋고, 밀어내고, 다시 그 위에 한지를 바르는 과정을 반복한 끝에 화면에는 긴 세로의 고랑을 형성하는 선이 축적되어 자리합니다.



Courtesy of Louis Vuitton, GIZI Foundation

Installation view of "Louis Vuittion ArtyCapucines Presentation" at Louis Vuitton Maison Seoul


박서보 작가의 붉은색 묘법은 미술시장에서 많은 컬렉터들이 애정 가득 어린 시선으로 주목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국 작가로서는 최초로 명품 브랜드 루이 비통과 협업하여 붉은색 묘법 작품으로 디자인된 핸드백 아티카퓌신(ArtyCapucines)이 출시되기도 했습니다.




05 세계 5대 갤러리 화이트 큐브 전속 작가

Presented by White Cube and Galerie Perrotin


Exhibition view: Park Seo-Bo, White Cube, London (17 March–1 May 2021). Photo: Eva Fuchs, Ocula.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해 온 미술가로 평가받는 박서보는 영국 화이트큐브(White Cube)의 전속 작가가 되어 런던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는 당시 최다 관람객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Installation view of Park Seo-Bo at the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in Venice

Installation view of “Danh Vo, Isamu Noguchi, Park Seo-Bo” at the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in Venice. Courtesy of the artist and White Cube


박서보의 작품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 파리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 도쿄 도쿄도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 서울 국제 갤러리(Kukje Gallery), 리움미술관(Leeum Museum of Art)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1994년 옥관 문화훈장, 2011년 은관 문화훈장에 이어 2021년 문화계 최고 영예인 금관 문화훈장을 수문한 박서보 작가는 2022년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전시를 개최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한국미술의 위상을 높이고 있습니다.




06 통찰력과 열정을 갖고서


© SEOBO ART FOUNDATION


박서보는 그야말로 작품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좋은 스승으로 많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어주었습니다. 책 속의 지식보다 자유를 억압하는 규범을 넘어서는 창의력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선생 삼아 시대를 꿰뚫어 보고, 주변에서 진리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당부했던 박서보는, 자신의 말대로 통찰력과 식지 않는 열정으로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이자 '위대한 예술가'로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되려면 그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식지 않는 열정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만 제대로 유지하고 살면 돼요.
지식이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그리면 그림이 지식에 갇혀버려요. 자유를 억압하는 규범을 넘어서는 게 창의력이에요. 책도 많이 읽으면 좋지만, 이 세상 모든 게 선생이라고 생각하세요. 진리가 하늘이나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주변에 널려 있으니 그걸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리빙센스





참고문헌


https://www.instagram.com/p/CxfO2g7Odvm/?igshid=MzRlODBiNWFlZA==

https://ocula.com/advisory/picks/2021-03-30-park-seo-bo-white-cube/

http://m.viva100.com/view.php?key=20210920010005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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