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서 멀어져야 마음에서도 멀어지니까
난 결코 시아버지를 극복할 수 없다. 그분을 넘어서려 할수록 무너지는 건 내 쪽이다.
무너지면 일어설 기운조차 나지 않았고, 도리어 나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으려 했다.
이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한다면, 내가 계속 그분의 며느리로 살아야 한다면 난 점점 형편없는 인간이 될 게 뻔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시아버지로 인해 자괴감을 느끼고 자존감을 갉아먹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밤새 일을 한 뒤 한숨도 못 자고 시댁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명절 고속도로는 '가다 서다'의 지옥이었고 중간에 아이가 멀미로 토를 하는 바람에 졸음쉼터에 부랴부랴 차를 세웠다. 아이 옷을 갈이 입히고, 카시트를 빼내 구석구석 물티슈로 닦아내느라 진이 다 빠진 채로 다시 차에 올랐을 즈음 시아버지의 문자가 왔다.
'약속한 시간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가정교육이 잘못된 것이다'
늦어지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우리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게다가 본인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겨눈 내용이었다. 전쟁 같은 귀향길 한복판에 발이 묶였다는 이유로 '가정교육'을 잘못 받은 사람이 됐다.
이때 눈을 떴다. 아버님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둘째 아이는 말이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연령에 맞춰할 건 다 했기 때문에 발달이 늦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약 없는 출퇴근 시간으로 둘째 아이는 친정에서 살다시피 해서 잘 크고 있겠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느 주말 저녁, 친정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다 함께 티브이를 보고 있던 중 시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본인께서 먼저 전화를 하시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무슨 일일까 싶어 안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받았다.
"지금 7번 봐라. OO이랑 동갑인데 말을 아주 잘한다"
인사 한마디 없이 대뜸 티브이 프로그램 얘기라니.
당시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 중인 축구선수 이동국 아들 '대박이' 얘기였다.
"아버님, 티브이 프로그램은 편집이라는 걸 하니까 아이가 잘하는 부분만 모아서 보여주는 거예요"
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으신지 본인이 하고 싶은 말씀만 이어질 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지내서 그런 거 아니냐?"
'네? 뭐라고요? 할아버지 할머니, 그러니까 우리 아빠 엄마랑 지내고 있어서 아이 말이 더디다는 말씀이신 거예요?'
물론 이건 내 마음의 소리였다. 당시에는 당황스러워 저런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사돈이 우스우면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는 건가. 돈 버느라 고생하는 아들내외 대신 손주들 키우느라 허리 펼새 없는 사돈을 향해 뱉을 수 있는 말이 고작 이런 거라니.
지금 어린이가 된 둘째 아이는 우리 가족 중 수다쟁이 일인자로 살아가고 있다.
남편이 간암진단을 받고 절제술을 한 뒤 시댁에 처음 내려갔을 때였다. 아들이 생애 첫 수술, 그러니까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을 때도 서울에 올라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큰 일을 치르고 처음 뵙는 자리였다.
"네가 일을 안 하니 사돈은 아이들 안 봐서 편하시겠다."
또 나왔다.
당신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당신의 아들, 사위의 병간호를 위해 애쓰고 있는 사돈을 향한 예의 없는 발언.
"저희가 둘 다 집에 있는데도 둘 다 지쳐있으니 살림이며 음식이며 다 해주시고 애들도 보느라 편하신 게 아니라 더 힘드시죠"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일을 해야 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내 말은 그분에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말에 불과하다. 그냥 입을 닫았다.
당시 시아버지는 정년퇴임 후 내내 집에만 계시는 상황이었다.
같은 날, 남편이 근처 산으로 산책을 나가고 없던 때였다. 퇴임 후 사주 공부를 하고 계신다기에 내 생년월일을 말씀드렸던 적이 있다.
당시 난 불안한 프리랜서 신분이라 동료 방송작가들과 사주를 즐겨봤다. 사주를 볼 때마다 단골멘트는 '집안의 가장역할을 한다', '남편이 아내덕을 많이 본다', '평생 일을 해야 하는 고단한 사주다' 등이었다. 한마디로 난 사주조차도 파란만장이었다. 내심 이런 나의 사정을 알아봐 주실까, 당신의 아들이 며느리 덕에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인정해 주실까 기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역시 기대조차 말았어야 했다.
"넌 안하무인에 말을 함부로 한다더라"
"네? 제가요?"
"아니, 내가 너를 그렇게 본다는 게 아니라. 네 사주가 그렇다더라"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허구한 날 사주를 보러 다녔지만,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신선한 내용이었다.
설령 내 사주가 그렇다한들 아들의 병간호에 지쳐있는 며느리에게 ‘안하무인’이라는 말을, 말을 함부로 하는 (몰상식한) 사람이라는 말을 뱉고 싶으셨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안하무인' 네 글자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과연 난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무엇보다 시댁에서 이런 기가 막힌 말을 듣고 있는 걸 우리 엄마가 알면 얼마나 속상할까 싶었다. 아무리 독불장군이라도 당신 아들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는 나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거라고 내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잔소리를 하던 엄마였다. 사람의 도리라는 게 하찮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한동안 시아버지께 연락하지 않았다. 멀쩡한 정신으로 연락할 자신이 없었다. 원래 살가운 며느리는 아니었지만 카톡으로 아이들 소식이며 사진은 종종 전해드렸다. 그즈음 이사와 큰 아이 초등학교 입학 등 나름 대소사가 있었음에도 감감무소식인 며느리가 괘씸하셨는지 왜 연락이 없는지 묻는 연락이 왔다. 이른바 '안하무인' 사건 후 난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고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숨이 가쁘고 심장이 두근대는 공황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난 망가져가는데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이유를 묻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남편에게 울고불고 소리쳤다. 아버님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얼마나 힘든지는 알아야 하지 않냐며.
시아버지와 남편과의 몇 차례 통화가 이루어지고 아버님이 미안해한다며 사과하고 싶으니 전화를 받으라는 남편의 연락이 왔다. 핸드폰 화면에 '아버님'이라는 글자만 봐도 두근댔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그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픈 사람 힘들게 하면 안 된다. 아버지가 사과했다고 OOO한테 전화해라"
이게 그분의 사과였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번 비슷했다. 그분을 만나고 돌아올 때면 늘 비수 같은 말을 짊어지고 와야 했고 그 말은 씨앗이 되어 점점 내 머릿속에서 몸집을 불려 날 괴롭혔다. 아버님 앞에서 하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을 꽉 채워 밤이면 밤마다 암흑에 타자를 치듯 끊임없이 글자들이 흘러나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진 말 중 진하게 남아있는 상처는 결국 우리 부모가 담긴 말이다. 나의 부모를 모욕했던 말이다.
"맏며느리인 네가 잘해야 한다. 표현할 줄 모르는 분이니까 네가 잘하면 네 마음을 다 아실 거다."라고 늘 내 마음을 달래주었던 엄마는 틀렸다. 그분은 모른다. 선의를 베푸는 누군가의 마음보다 본인 마음이 늘 우선이 분이다.
마침내 난 결심했다. 내가 속해있던 이상한 나라에서 벗어나기로, 아버님이 살고 계신 나라의 며느리를 그만두기로 말이다.
무엇보다 간이식수술을 앞두고 우리 부모에게 연락한 번 하지 않은 일이 가장 컸다. 어쩌면 그 일이 쐐기를 박아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보통 사랑하는 관계에서 많이 언급된다. 계속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이 멀어지면 안 된다고. 그런데 가만 보면 관계가 힘든 사이에서 더 적합한 말이 아닐까 싶다. 아버님을 마음에서 지우기 위해 몸이 멀어지는 걸 택했다. 선명하게 새겨진 그분의 비상식적인 행동과 잔인한 말은 몸이 멀어져야 옅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내 머리와 가슴에 들어찬 그것들이 지워져야 내가 살아갈 수 있다.
남편과 더 살아가기 위해서다. 남편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다.
남편의 모습에서 그분의 모습이 겹쳐 보일 때 견딜 수 없다. 뚜렷한 기억이 흐릿해질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에겐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
이제라도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나의 간 기증’ 덕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답이 안 보이는 내게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무기’가 생긴 것이다. 목숨 걸고 얻어낸 나의 무기다.
남편을 살리기 위한 간 기증이 결국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있다.
맏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내려놓으며 알려드리고 싶다.
당신의 며느리가 되어 지나온 시간 중 당연한 건 한 순간도 없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