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만이 내 세상
난 책이라고는 징그럽게 안 읽는 어린이였다.
변변치 않은 형편의 우리 집이었지만 그 시절 잘 나가던 전집이나 백과사전은 좁은 우리 집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와는 달리 부지런히 읽어대는 언니와 여동생 덕에 비싼 책을 사다 나를 맛이 났을 엄마다.
꼬마 시절을 지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40대 언저리에 놓인 우리 세 자매는 만났다 하면 지지리 궁상이던 어릴 적 얘기를 한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할 말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그중에서도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책과 옷에는 야박하게 굴지 않았던 엄마는 단골 주인공이다. 학원 다닐 처지는 아니고 마땅히 할 일이 없을 때 책이 친구였노라고 털어놓는 언니와 여동생을 보면 난 여전히 놀랍기만 하다. 책이 친구라니. 하긴 나랑 연년생인 언니는 책을 줄줄 외우고 외운 글귀의 자릿수를 맞춰가며 네 살 때 글자를 혼자 깨우쳤다고 엄마는 입이 닳도록 얘기한다. 그 덕에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고 생애 첫 단체생활이 ‘국민학교’였던 언니다.
(남동생을 제외하고) 세 딸 중 유일하게 나만 책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사람 일은 결코 모르는 일인 게 어른이 된 나는 어이없게도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됐다. 여전히 우리 엄마는 이 사실을 놀라워한다. 생전 책이라고는 제일 안 읽던 내가 작가가 됐다며 말이다. 사실 ‘글발’보다는 ‘말발’과 ‘잡일’의 비중이 큰 방송작가이지만 어쨌거나 난 '임작가'로 불리며 밥벌이를 했다.
그런데 또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별개다. 책과는 꾸준하게 거리 두기를 해왔지만, 끄적거리는 것은 멈춘 적이 없다. 어린 시절 난 이상하리만치 글짓기 대회 상은 놓치지 않았다. 친구와의 교환일기는 물론 다이어리 정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첫 사회생활이었던 영화사 입사 후부터는 작은 수첩을 들고 다니며 명쾌한 광고 문구나 재미난 간판, 버스 옆에 붙은 영화 카피 등 거리에서 눈에 걸리는 건 죄다 적곤 했다. 스마트폰이라는 게 생긴 후부터 휴대폰 메모장은 하루에도 수십 번 들락날락거렸다. 그냥 생각나는 모든 것을 적는 '끄적끄적'부터 방송용 '아이템', 아이의 '어록' 등 수십 개의 메모 리스트가 있다.
남편의 암을 만나고도 멈추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 자체가 감사했던 일상이었다. 입원한 남편 침대 옆 좁다란 보호자 침대에 누워서도 기록했다. 그 순간 나의 마음을. 옆 침대 가족의 대화를.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의 신음을.
간기증자가 되어 내가 병실 침대의 주인이 되었을 때는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병실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 고마웠던 누군가의 한마디. 그리고 외로웠던 내 마음.
잊고 싶은 않은 것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 순간의 마음들, 찰나의 생각들을
그렇게 썼고 쓰고 있고 써 나갈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시린 눈을 떠 블루라이트를 아낌없이 흡수하며 남겨 두었다. 걱정, 두려움, 불안, 괴로움, 간절함, 원망, 감사함, 아련함, 서러움 등 내가 느낀 모든 감정을. 머릿속에 맴돌고 엉키고 터져버릴 것 같을 때에는 쏟아내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내겐 글이 유일하고도 강력한 해방이자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수단이었다. 머릿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생각의 속도를 엄지손가락 두 개가 따라가지 못할 때는 일어나 노트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의 전원은 24시간 꺼지지 않는다.
2019년 12월 30일, 간이식 수술을 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내 몸에서 빠져나와 글자가 되고 그것들로 뭉쳐진 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떤 때는 분노에 차 원망만 가득이었다. 어떤 때는 세상 제일 불쌍한 여자가 되어 주절주절이었다. 스스로도 보기 힘들 만큼 괴로움으로만 꽉꽉 눌러진 배설물은 아낌없이 지웠다.
펄펄 끓던 국이 한 김 식기를 기다리듯 용광로 같던 원망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 누구도 아닌 내 마음만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마음속 불순물이 가라앉길 바랐다. 게워내듯 쏟아낸 누군가를 할퀴기 위한 글이 아닌 지난날을 떠올리며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때론 힘을 빼야 진정한 힘이 생긴다. 이제야 난 그 시간을 제대로 만났다. 이제는 꺼내 보일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
이것만이 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