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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파란 Sep 12. 2023

발걸음으로 버티는 시간

오늘도 난 걷는다


그날은 처음으로 구급차를 불렀다. 아이들이 잠들고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구토가 시작됐다. 낮에 회를 먹었다길래 그저 배탈인 줄 알았다. 구토가 잦아지고 급기야 설사까지 보태졌다. 분 단위, 아니 체감상 초 단위로 위아래로 뱉어내니 기운은 순식간에 바닥났다. 단순 배탈이 아닌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염증이 다시 찾아온 것 같았다. 이러다 사람 잡겠다 싶어 떨리는 손가락으로 119를 누르고 구급차에 올라탔다. 


남편이 간이식 환자임을 밝히고 모든 병력이 있는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부탁드렸다. 그 병원 응급실은 환자가 많아 대기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구급차 안에서 측정한 열이 37.5도. 어쩔 수 없이 코로나 의심 환자로 분류되어 응급실 옆 간이 컨테이너로 안내되었다. 코로나가 아니라고, 간이식 환자라 염증 수치가 높아져 열이 높아진 것일 거라고 했지만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열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는다. 코로나 음성 결과가 나와야만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남편은 몸을 돌릴 수도 없이 좁은 의자에 급하게 챙겨 온 수건을 베고 누워 버텼다. 더디게 가는 시간이었지만 꾸역꾸역 아침은 왔고, 여전히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남편을 컨테이너에 남겨둔 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러 집을 향해 걸었다. 


깨워야 할 시간이 이미 지나버린 터라 경보에 가까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드디어 음성 결과가 나와 병원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는 전화가 왔다. 늘 타이밍은 이렇다. 내가 자리를 뜨길 기다렸다는 듯이 상황이 바뀐다. 간밤에 아빠의 요란한 구토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자더니 여태 잘 자고 있는 애들을 목청껏 깨워 달걀 프라이와 우유 한잔으로 대충 아침을 먹인 뒤 학교로 보냈다. 어질러진 집을 둘러보다 눈에 거슬리는 것들만 휘리릭 정리한 다음 다시 병원으로 걷는다. 


응급실 격리병동은 처음이었다. 들어갈 때는 물론 나갈 때도 의료진의 허가를 받아야만 오갈 수 있어 여간 불편하게 아니다. 문을 열어달라 청하는 것도 눈치가 보여 화장실도 버티고 버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에 다녀와야 했다. 감옥이 따로 없다.      




병원에서의 시간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무슨 검사를 해보자는 얘기를 겨우 들을 수 있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검사 순서를 또 기다린다. 그리고 다시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검사 결과보다 아이들 하교 시간이 먼저 돌아온다. 다시 집으로 걷는다. 아이들 먹을만한 걸 챙겨주고 시간 맞춰 학원 가고 숙제하고 엄마가 없는 사이 해야 할 일을 단단히 일러준 뒤 다시 집을 나선다. 


남편 몸이 좋지 않은 나날에는 어쩔 수 없이 날이 선 채 지낸다. 나만을 위한 밥을 차리는 수고를 마다하고 굶기를 택한다.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말을 섞지 않고 꼭 필요한 용건이 아니고서는 누군가에게 전화도 걸지 않는다. 워낙 먼저 연락을 하는 일이 드문 편인 나에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지만, 몇 번 반복되는 상황을 겪으며 그냥 이렇게 되어 버렸고 어느새 굳어졌다. 그냥 마음이 그러라고 하는 대로 움직인다. 


다시 병원으로 걸어와 남편을 부축한 채 몇 번의 화장실을 오가고 몇 차례 의료진을 만난 뒤 하늘이 까맣게 된 후 집으로 걷는다. 남편은 병원, 난 아이들과 집. 각자의 밤을 지내고 다시 아침이 되면 병원을 향해 걷는다.    



남편이 병원에 있는 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은 계속 걷는 거다. 하루에 이만 보는 우습다. 그렇게 걷다 보면 남편은 치료를 잘 견뎌 다시 집으로 올 수 있다. 


불시에 찾아오는 고통이지만, 다행히도 매번 해결책은 있고 잘 이겨내는 남편이 있고 열심히 걷는 내가 있다. 이렇게 우린 우리만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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