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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핍의 임상심리사 May 27. 2024

안 되는 건 없다.

경험으로 부터 배우는 인간


내용 증명이 임대인에게 전달 되고 나면 보증 보험을 받을 준비를 해야한다. 

보증 보험 신청은 계약 기간이 종료된 뒤 한 달 뒤부터 가능하지만, 보증 이행에 문제가 없는지 미리 확인 해야 하고, 계약 종료 직후 임차권 등기 설정을 해야하기 때문에 필요한 서류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너 근데 좋은 경험한다"며 농담 같은 진담을 했다. 

사실 지나고 보니 나도 개인적으로, 나 같은 인간에게 어쩌면 한 번은 필요한 경험이었나 싶을 지경이었다. 워낙 귀찮은 절차를 싫어해서 새로운 일은 시작 조차 안 하려 하고, 특히나 경제 영역에 무관심해서 재산 관리나 투자에도 무지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치르면서 법에 대해 공부도 많이 했고, 경제에 대한 관심도 상당 부분 늘어나게 되었다. 

어떤 경험이든 배움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아차리게 된다. 



안 좋은 일은 우르르 몰려온다. 


보증 보험 이행을 준비하는 동안 임대인은 나에게 자주 연락을 해왔다. 

미안한 마음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이유였는데, 기다리는 동안 세입자를 들여 월세를 받아 주겠다는 둥, 당장 짐을 뺄 곳이 없으면 본인이 갖고 있는 공실로 옮겨주겠다는 둥, 배려심 가득한 태도를 보였다. 


당연히 보증 보험 이행 절차 중에는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면 안 되기 때문에, 임대인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내가 보증 보험을 받고 나가면 본인의 재산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니, 이런 저런 테클을 걸며 방해하려 했다. 처음에는 사양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반복되는 그녀의 어설픈 방해공작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고소 당하기 싫으면 그만 하세요."하고 말하자, 

그녀는 또 벌컥 화를 내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네요."라고 답했다. 


돈 앞에 인간이 저렇게 가식적이고 치졸해 지는구나. 

보증 보험만 받으려 했는데, 저거 피해보상까지 받아버릴까. 


임대인의 방해 공작 외에 다른 이슈는 이번에 내가 집을 매매 했다는 것이었다. 

매매한 집에 잔금도 치러야하고, 또 매매하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특히 생애 첫 주택 매입이기에 취득세를 감면 받게 되는데, 

기한 내에 새 집으로 전입 신고를 하지 않으면 추징금을 내야했다. 

하지만 임차권 등기를 설정하더라도 전세 집에 전입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택도시공사의 안내를 받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비슷한 시기에 반려묘가 큰 병을 얻어 죽을 고비를 넘겼었는데, 워낙 치료 비용도 많이 나가고 혹시나 아이가 정말 떠나면 어떡하나 걱정하느라, 또 매일매일 퇴근하며 아이가 입원한 병원을 오가느라 피곤하기도 해서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아이는 두달 가까이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아, 최악이다. 올해 말은 최악이야. 



그럼에도 안되는 건 없더라. 


이런 저런 일들을 동시에 처리하면서, 또 나의 일상도 같이 흘러가고 있기에 정말 심리적으로 많은 소진이 있었다. 시간 자체도 부족했지만 에너지 고갈이 제일 문제였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지나오면서 나는 내가 정말 강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돌이켜 보니 나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일도, 집 문제도, 반려묘 문제도 각자의 길을 만들어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씩 처리해 나간 느낌이었다. 


일단 필요한 짐만 챙겨서 새집으로 이사했다. 전셋집 전입을 유지하고, 집을 점거하는 게 중요한 사항이라서 부피가 큰 짐은 그대로 두고 나왔다. 생각보다 옮겨야할 짐이 많아서 이삿집 센터를 이용할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러기엔 또 너무 적은 짐이었다. 혼자 엘레베이터를 이용해 짐을 나르고, 트렁크, 뒷자석, 조수석까지 꽉꽉 채워 쉬는 날마다 옛날 집에 가서 총 세 번에 나눠 짐을 옮겼다. 아, 정말 말이 쉽지. 이 과정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던지. 


그와중에 새집 화장실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도배도 하고, 지금 하지 않으면 피곤해질 일들도 빼놓지 않고 했다. 새 가전과 가구를 조금씩 나누어 구입했고, 짐 정리도 했다. 


이사 후 한달이 되었을 때, 보증보험 이행 청구를 했다. 그동안 꼼꼼하게 챙겨왔지만, 혹시나 새로운 이슈가 등장해서 이행 청구에 문제가 생길까 조마조마 했다. 어쨌든 그 다음부터는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추징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할 지역의 도청, 시청에 전화하고, 여기 저기 도움을 청했다. 결과적으로 추징금은 막지 못할테니 일단 납부하고 나중에 경정청구를 해보라는 답변을 받았다. 시와 도에 나름의 유명인사가 되어 이름만 말하면 바로 담당자에게 연결해 주었다. 특히 시에서는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도와줄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지만, 도에서는 국토부에 문의하고 예외사례를 찾아보려고 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어서 정말 감사했다. 


시와 도에서 결국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주택도시공사에 문의해 사정을 말하니, 아직 한참 차례가 남았지만 내 사건의 일정을 당겨 먼저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이미 추징금을 내기는 했지만, 운 좋게 기한이 당겨져 일찍 경정청구를 하고 돌려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보증금 이행. 이삿집 센터를 예약하고 집을 깔끔히 비운 뒤에 이곳 저곳 사진을 찍어 보내고 나니 보증금이 입금되었다. 통장에 찍힌 그 돈이 내 돈이 맞나 생소하고 불안하면서도 엄청난 안도감이 느껴졌다. 


지나고 보니 다 별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저걸 내가 하나씩 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역경을 지나오면서 나는 정말로 내가 성장했다고 느꼈다. 진짜 어른이야. 어른. 


그래. 다 인간이 하는 일인데 안 되는 게 어디있나. 사정을 말하고 보채고 기다리면 뭐든 해결이 되긴 하더라. 정말 큰 교훈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방향을 정하고, 고통은 감내하면서, 그리고 정진해 나가면 결국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일상은 살아가면서, 해야할 일은 처리하고, 다시 일상만이 있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리고 끝내 돌아온 일상만이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알아차리게 된다. 


참고로 우리 고양이는 완벽히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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