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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숲 Jan 12. 2022

엄마가 원했던 삶은 그게 아닐지도 몰라

그 때 내가 할머니 치맛폭에 숨지 않았더라면, 엄마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자그마한 시골 예천군의 공원이 있는 동산, 동산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 있는 작고 허름한 푸른 지붕, 커어다란 감나무 집이 그녀의 집이었다. 여자는 집안의 조용한 등불 같았다. 11살부터 가마솥에 밥을 지어야 했다. 참전용사로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는 일을 할 수가 없었고, 사회생활의 결핍으로 인한 짜증과 화를 아내에게 내었다. 작고 연약한 여자의 엄마 혼자 여섯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야 했고, 그 중 아이는 넷이나 되었다. 다행히 둘째 딸은 늘 알아서 모든 걸 해내었다. 아무것도 없는 살림에도, 꼴에 안동 권씨 양반 집 전통만은 시벌겋게 남아, 여자 아이 혼자서 엄마가 없는 동안 밥을 짓고 집을 돌봐야 했다. 위로 오빠 하나, 아래로 둘인 동생들도 그녀의 몫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공부를 잘 했고 잘 놀았다. 늘 반장을 도맡아 하고 성적이 좋았으나, 없는 살림에 셋째가 미대에 진학하며 동생에게 대학마저 양보를 해야했던 그녀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공부 머리가 있었으니, 공무원 시험에는 한 번에 붙었고 똑똑하고 야무진 딸 대학에 못 보내준 미안함과 스스로 살 길을 찾아가는 기특함과 고마움을 담아 그녀의 어머니는 고향 마을에 현수막을 걸었다고 했다.


그녀는 인근에 있는 소도시 시청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어느 날, 민원실에 볼 일이 있어 들렸는데 갑자기 사무실이 훤하게 밝아졌다고 했다. 응? 누가 불을 더 켰나 뭐지? 하고 돌아보니 부처님 처럼 뒤에서 후광이 나는 남자가 서 있더라고. 그게 내 엄마와 아빠의 첫 만남이었다. 잘 생긴 아부지, 아버지 허벅지 보다 허리가 가늘었다던 엄마의 만남은 이슈가 됐을게 불보듯 훤했다. 젊은 청춘 남녀는 부모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가진 것 없이 단칸방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그렇게 축복의 씨앗이 움텄다.


그렇게 내가 태어났고 일을 해야 했던 엄마는 육아휴직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 나를 두고 일터에 복귀했다. 젖이 흐르면 가슴에 손수건을 받치고 화장실에서 젖을 짜서 담았다고 했다. 그렇게 나를 키웠고 어린 나는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부모를 보며 숫기가 참으로 없던 나는 어느 날 할머니 치마 폭에 숨어 오랜만에 찾아온 아빠를 피했다고 한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아빠는 결국 화가 터졌다. 귀하게 키우고만 싶었던 조그마한 딸이 자신을 피해 숨는 걸 보니 서운했던 걸까, 서러웠던 걸까. 결국 엄마에게 뭐 때문에 일하냐, 다 때려 치우란 불호령이 떨어졌고 대학 대신 선택했던 공무원의 자리도 할머니 치마 폭에 숨은 나 때문에 접어야만 했다.


엄마가 좀 더 모질었더라면

아빠가 어린 나보다 엄마의 꿈을 더 소중히 했더라면

내가 할머니 뒤에 숨지 않았더라면

엄마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비슷한 또래를 키우는 친구들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을 그만두고 우리 곁에 있었던 엄마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가 그랬다. '엄마도 너희 곁에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셨을거야' 라는 말을 듣는데 어린 남매를 두고 일터에 가야하는 죄책감을 덜했을지 몰라도 '엄마가 원했던 삶은 그게 아닐지도 몰라' 라는 말이 나왔다. 그 날 엄마가 처했을 상황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엄마라는 여자를 생각했다.


아마 일을 그만두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엄마는 아주 어린 우리 남매를 데리고 산문대회를 나갔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초록 잔디밭에 작은 돗자리를 깔고 우리가 옆에서 놀면 엄마는 가만히 앉아 글을 썼다. 엄마는 우리를 키우는 동안에도 여기저기 일자리 제안을 많이 받았고 일하러 가는 깔끔한 정장에 구두를 신으면 엄마는 반짝 반짝 빛이 났다.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학교를 다닐 때, 맞벌이 부모를 둔 친구는 학창 시절 내내 내가 부러웠다고 했다. 내 친구들은 늘 나를 부러워 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마다 엄마는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나를 지켜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있었다. 할머니 치마 폭에 숨었던 나 때문에, 나를 위해 글 잘 쓰는 엄마는, 일을 멋지게 잘 해내던 엄마의 인생을 접고 우리의 곁을 지켰다.


가끔 엄마는 내게 그랬다. '동기 친구들이 지금 부장달고 국장달고 있는데 너무 부러워서 눈을 못 보겠더라, 그때 일 그만 안 뒀더라면 너네가 나를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돈 많이 벌어다주는 엄마가 결국 최고아냐?' 하고 웃었는데 아니라고 대답을 크게 못 해드렸다.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엄마, 그때의 어린 내가 미안하고 너무너무 고맙다고, 우리 곁에서 엄마로 있어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그때의 엄마를 꼭 닮은 내가 내 꿈보다 내 아이가 우선인 삶을 살아보니 알겠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참아야 가능한 일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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