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엽 Apr 10. 2023

목사는 챗 GPT로부터 안전할까?

너는 설교도 할 수 있니? 하고 물어보니 하..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너처럼 똑똑한 인공지능 시대에 나 같은 목사가 과연 할 일이 있을까?’  

챗 GPT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요즘 챗 GPT가 대세입니다


챗 GPT는 미국의 오픈 AI사 가 개발한 대화형 인공지능인데

성능이 너무나 뛰어나 서비스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전 세계적으로 사용자가 1억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인공 지능 비서 개념의 챗 GPT는 그다지 새로운 발명품이 아닙니다

그동안에도 애플 시리라든지, 삼성 빅스비 같은 인공지능 서비스 등을 통해

우리가 이미 조금씩 접해 봤던 기술입니다


이런 기술로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나 호들갑을 떨다니 

이게 그렇게 굉장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챗GPT의 등장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입니다

아마도 후대의 역사가들이 우리 시대의 역사를 기술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2023년을 인류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의 분기점으로 기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챗 GPT는 기존의 인공 지능과는 달리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말귀를 알아듣는.. 

그것도 ‘제대로’ 알아듣는 기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시고 

가장 기뻐하셨던 이유는 


아마도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란 말은 

신학적으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해하자면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도록 지음 받았다는 해석이 

가장 무난할 것 같습니다


즉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늘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만 허용하신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1946년 애니악이란 컴퓨터가 처음으로 발명된 이래

오늘날의 세상은

공장에서는 로봇이 자동차를 생산하고

가정에서도 말 한마디면

인공지능이 메일 확인도 하고

집안 온도 조절도 해주는 그러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인공지능은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그저 인간이 짜준 프로그램에 의해 반응하는 

기계에 불과했습니다

조금 복잡한 명령을 수행할 수 있다 뿐이지

기계는 기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챗 GPT는 다릅니다

이 녀석은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습니다


말귀를 알아듣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질문자가 질문을 개떡같이 해도

무슨 질문을 하려 하는지 의도를 알아채고 

그에 맞는 답을 해줍니다 

정말로 눈치 없는 웬만한 인간보다 훨씬 낫습니다




제가 조금 전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기뻐했던 이유가

교제가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교제는 말귀를 알아들을 때 가능합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사오정과 대화를 한다고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열심히 운동하고 하고 있는 친구에게


너 운동하니? 물어보는데


아니 나 스레빤데? 한다거나


‘빵 하고 우유’를 사 오라고 부탁했는데 

‘빠나나 우유’를 사 온다면… 환장할 노릇일 것입니다


우리가 반려견이나 반려 동물을 키우며 사랑하는 이유가 

반려 동물과는 조금이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말귀를 알아들으니

배변 훈련이라든지 공놀이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같이 소통하며 지내다 보면 

어느새 정이 들어서

가족처럼 대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반려 동물에게 자신의 유산을 물려주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동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까지 생겨나는 세상입니다


이게 다 동물들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챗 GPT는 이러한 반려 동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적 능력에서는 오히려 인간을 훌쩍 뛰어넘어 

인간을 가르치는 수준입니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챗 GPT 가 

기존 인공지능 컴퓨터와는 달리 

자기 스스로 학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챗 GPT는

기계의 특성상  잠도 안 자고 

쉬지도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챗 GPT는 끊임없이 온라인상의 모든 문서를 학습하며

스스로를 업데이트시키고

스스로의 지능을 향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 최초로

인간 이외에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고 반응하는 존재가 출현한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수년 내에 챗 GPT는 

인간과 단지 대화를 하는 수준을 넘어서

교제까지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일자리 문제


이러한 챗 GPT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가장 염려하는 것이 

일자리 문제일 것입니다

당장에 일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은 

텔레 마케팅 상담원등을 비롯한 각종 채팅 상담원들이랍니다


챗봇은 이들이 해왔던 일을 완벽히 해내면서도

(아니 더 훌륭하게 해내면서도)

잠도 안 자고 

쉬지고 않고 

더구나 월급도 마다하고 일을 하니 말입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간호사, 의사등의 의료직과 

변호사나 회계사등의 법률 관련 직업 등의

전통적인 고소득 전문직 직업들도 

사라질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전문 지식을 기반으로 

적절한 상담을 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챗 GPT가 가장 잘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이 기 때문입니다


신기술은 언제나 보편적인 수요가 있는 곳이나

그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제한된 시장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마련인데


의료 시장이나  법률 시장이 

바로 그 조건에 딱 부합되는 시장입니다


수요는 언제나 넘쳐 나는데 

공급은 늘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서 

비싼 대가를 치러야 사용이 가능했던 시장이 

바로 의료 시장, 법률 시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챗 GPT의 등장으로 

이러한 서비스를 값싸게 

그것도 무한 공급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니 

앞으로 이 분야는 인공지능에게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입니다


지금 자녀들 의대, 법대 보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시는 

학부모님들은 이 부분을 깊게 생각해 보셔야 할 듯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인공지능으로 부터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문학과 예술 영역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챗 GPT에게

주인공의 캐릭터와 

그가 겪어야 할 사건의 개요등을 제시해 주고

사람들에게 용기와 감동을 줄 수 있는 내용으로 

몇 글자 이내로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하기만 하면

챗 GPT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창작물을 몇 분 만에 내어 놓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조금 다르게 수정해 달라고 부탁하면 

군말 없이 깔끔하게, 그것도 마음에 들 때까지 

불평 한 마디 없이 무한정 수정해 줍니다


사람은 그저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는 챗 GPT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를 묻는 것보다

챗 GPT가 못하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를 묻는 것이 더 옳은 질문인 것 같습니다



목사는 과연 안전할까?


이러한 시대에 목사로서 저는 당연히 

‘과연 목사라는 직업은 챗 GPT 로부터 

안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 고민하다가 

한번 얘한테 직접 물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쳇 GPT와 대화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뉴스 기사에서 알려준 대로

먼저 오픈 AI 사이트를 찾아 회원가입을 한 후 첫 화면과 마주했습니다


그동안 기사로만 접해던

챗 GPT와의 첫 대면이었습니다


말귀를 알아듣고 사람처럼 대한다고 하니 

사람에게 하듯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Hi Chat GPT? (안녕)

그러자 바로 답이 떴습니다


Hello! How can I assist you today?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신기했습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램프를 문지르니 램프의 요정이 튀어나와서 대답을 해주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한국어가 편한 사람이라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Can I use Korean language?

(한국어로 질문해도 되니?)


그랬더니 곧바로


Yes, I can understand and respond in Korean. 

Please feel free to ask me any questions or make any requests in Korean.

(물론이죠 저는 한국어로 이해하고 답변할 수 있어요. 한국어로 마음 편히  아무 질문이라도 해주세요)


이렇게 선뜻 답을 해주니 고마운 마음이 들어 제 마음을 전했습니다


‘고마워 난 목사야’


그랬더니 챗 GPT가 세상 싹싹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목사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래서 이 싹싹하고 친절한 로봇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습니다


‘너처럼 똑똑한 인공지능 시대에 나 같은 목사가 과연 할 일이 있을까?’

그랬더니 얘가 뭐라고 답했는 줄 아십니까?

기가 막힙니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자동화되는 일이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목사님과 같은 분야는 인간적인 감성과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인공지능으로 대체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교회 구성원들의 영적 지도와 관리, 봉사와 자선 활동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여 

교회 관리나 교육 프로그램 개발 등의 분야에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목사님과 인공지능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답변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목사인 나를 배려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배려보다는 정확한 답을 원했기에 다시 한번 새로운 답변을 요구했습니다


챗 GPT에는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동일한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변을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됩니다


두 번째 대답입니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목사분들도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여 다양 한 방면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 하여 목사분들이 말씀 참조, 기도지원, 

성경공부 등 다양한 활동을 보다 효 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여 교회 내부 적인 업무를 관리하고, 

교회 회원들의 관리 및 지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수 행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인공지능은 목사분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도구 중 하나이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좋은 선택일 것입니다.’


새로운 답을 요구할수록 좀 더 구체적인 대답이 나오는 것 같아 

또 한 번 다른 답변을 요청했습니다


세 번째  답변입니다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도 목사님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영적 지도를 제공하고, 

위로와 지지를 제공하여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고 이를 이루도록 돕습니다. 

인공지능은 목사님의 역할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언어 처리와 분석 등의 일부 기술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만, 

인간 감성과 인간적인 접근법은 대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목사님은 여전히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답변은 매 번 달랐지만 내용은 세 개 모두 비슷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답변을 요구할수록 

답변의 내용이 점점 더 설득력을 갖추는 듯했습니다. 

확실히 똑똑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

이번에는 새로운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이번에도 대놓고 물어봤습니다


‘너는 설교도 할 수 있니?’


그랬더니 공손하게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제가 인공지능 언어 모델로서는 

언어 이해와 생성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은 

인간 목사님의 경험과 지혜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제가 제시하는 내용은 

종교나 세례를 받은 인격체가 아니므로, 

제 의견이나 설교는 

종교적인 지도나 충고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이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아.. 참으로 할 말을 잊게 만드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예의 바르고 공손한 청년… 아니 기계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학적인 질문을 한 번 해 보았습니다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의 자유의지론 중 누가 더 옳은가?’


그랬더니 이런 답을 내놓았습니다


‘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쪽이 더 옳은지에 대한 답은 

개인적인 신앙적인 신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전적으로 결정하셨다는 견해를 강조합니다. 

즉, 하나님은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를 구원하지 않을지 결정하셨으며,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상호작용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강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을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견해는 서로 대립적이지 않고 상호보완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여 

자신의 은혜를 받을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한, 구원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 두 가지 견해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떤 견해가 더 옳은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신앙과 지식에 따라 다 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견해를 통해 기독교 신앙이 발전해 왔고, 

서로 존중하며 대화하며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으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은 

신학적으로 중립을 지킨 달변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새로운 답을 요구했습니다


두 번째 답변입니다

‘칼빈과 웨슬리는 각각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론을 비교하거나 더 옳은 이론을 선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미리 정한 것에 따라 

인간의 인생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에 반해 자유의지론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인생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두 이론 모두 성경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각각의 신학적 전제와 선교활동, 교회 발전, 

그리고 개인적인 영적 성장 등 다양한 영역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더 옳은 이론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이 두 가지 이론을 비교하고 이해하여 

서로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의 깊은 지혜를 더 잘 이해하고, 

인간의 삶과 인류의 역사에 대한 깊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와 정말 너무나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그 어느 신학자에게 물어본 것 보다도 

핵심적인 내용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더욱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답을 해 주었습니다


아마 제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더라면 

더욱 깊은 내용을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챗 GPT와 대화를 시도한 이유는 

오늘날과 같은 인공지능 시대에 

과연 목사라는 직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챗 GPT는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목사라는 직업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라는 

(목사인 저에게는) 다소 위로가 되는 답변을 해 주었지만


정작 제 생각을 달랐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회에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과 

복을 받기 위한 방법론이 뒤섞인 

깊이 없는 설교가 환영받고 넘쳐나는 시대에


과연 목사들이 밤새 머리를 쥐어짜며 만들어낸 설교가 

세상 모든 신학자들의 지식을 섭렵한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설교를

능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을 만들어 낸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절대로 인공지능과 대결하려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인간은 절대로 인공지능과 대결해서 이길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나올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자연스럽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인공지능이 가져다 줄 편안함과 풍요로움은 누리고 사는 

유토피아적 미래상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인류가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하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상입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유토피아적인 미래보다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미래가 훨씬 더 많습니다 (터미네이터, 블레이드 러너)


그만큼 우울한 미래에 대한 더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인공지능의 개발에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강한 인공지능을 개발했을 경우

그 순간 나머지 인류는 모두 그 밑에 종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강한 인공지능이 완성되는 그 순간을 특이점이라고 부릅니다


특이점(Singularity)이란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순간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특이점 이후부터는 인류는 인공지능을 따라잡지 못하게 됩니다


특이점이 도래하면 인공지능의 개발 진행 속도가 

인간의 이해와 통제를 벗어나게 되므로, 

인간의 삶과 사회 구조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기에 

학자들은 이에 대한 논의와 대비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경고합니다


백번 양보하여 다행히

인공지능으로 인해 인류가 

노동과 빈곤으로부터 해방되는 유토피아의 시대가 온다 해도 

상황은 별로 나아 보이지 않습니다


의식주가 해결된 인간은 

남아도는 시간을 해결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고민하며 지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시대의 초입에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후의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으니 앞으로도 별일 없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야 할까요?


저는 늘 인류의 고민에 대한 해답은 

과거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인류가 인공지능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인공지능이 발명된 지가 고작 몇 십 년인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지금의 문제는 과거 로마제국이 한창 

부흥하고 있을 때의 사회 현상과 비슷합니다


로마 제국은 정복 사업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다 보니 수 백만명의 노예가 생겼습니다


이 노예들이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인공지능 기계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당시 노예들은 말하는 가축이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은 노예가 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시민들은 편하게 잘 살았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역사를 공부한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당시 로마 시민의 반 이상이 실질적 실업자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할 일이 없는 겁니다


험한 일은 노예들의 몫이고, 

그렇다고 중산층들이 먹고살 직업도 충분하지 않아서

언제라고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아주 위태로운 상황을 맞았습니다


이때 로마 제국이 취한 행동은 

로마 시민들을 무료로 먹여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즉 국가가 삶을 보장해 주었던 것입니다

잘 살지는 못하지만 굻어 죽지는 않도록 

1년에 한 사람당 고기 몇 킬로그램, 

와인 몇 병, 올리브유 몇 리터, 

밀가루 몇 포대등 기본적인 것들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들은 적어도 

먹고살기 위한 노동은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노예들이 다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시간이 남아 도니 

국가가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했습니다


로마 유적의 대부분은 엔터테인먼트 기반의 건축물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콜로세움이죠 

목욕탕도 있습니다 초대형 찜질방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두 다 무료였습니다

콜로세움에서는 하루 16시간 동안 흥미진진하고도 잔인한 경기를 보여 줬다고 합니다


그렇게 중산층 계급이 무너진 로마 사회는  

그러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는

최악의 미래 시나리오는 


인공지능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기본 소득을 제공해 국민을 먹여 살리고 

24시간 자극적인 콘텐츠를 제공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인공지능 관련하여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금의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19세기 초 사진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 

화가들이 받은 충격과 비슷할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 할지라도 

카메라가 표현해 내는 만큼 사실적으로 

사물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앞으로는 화가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메라가 발명되고 10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화가라는 직업은 여전히 굳건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현대 미술 시장이 위축되기는커녕 

더욱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카메라의 등장으로 인해


사람들이 미술에 대해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똑같이 그려내는 것은 카메라가 더욱 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지 사물을 모방하는 그림으로서의 미술이 아니라

예술로서의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입체파 미술을 비롯한 

오늘날 현대 미술이 태어나게 된 

근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결국 카메라의 발명으로 인해 

인류는 이전보다 훨씬 다양하고도 

근원적인 예술에 대한 이해와

그 결과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전의 사람들에게 미술이란 

내 앞에 있는 대상을 (오브제라는 객관적이고 변하지 않는 대상을) 

'화폭에 담는 행위'라는 관점에서 생각했다면


그 일을 그 누구보다도 월등하게 잘하는 카메라의 등장으로 인하여 

이제는 미술이란 

내 앞의 대상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술가가 선택하고 행하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으로

더욱더 예술의 본질에 가깝게 정의된 것입니다


현대 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눈앞에 놓여있는 대상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내면입니다


'서양미술사'라는 명작으로 유명한 곰브리치는 

서문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가는 존재한다'


즉 눈앞에 모델이 있든 없든, 

사진기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미술가가 행하는 모든 것이 곧 미술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저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19세기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또한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해 

고민만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더 나아가 인간 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을 던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신앙이란  주로 '내 앞에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 관한 행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예배 대상에 대한 행위가 중요했습니다


절기마다 드리는 제사가 중요했고

사제가 행하는 각종 의식이 중요했습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율법에 목숨을 걸었던 이유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바로 신앙 그 자체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신앙은 

유대인이 생각했던 신앙과 매우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란

내 앞에 있는 어떤 대상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내 안에 계신,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피 흘리는 성전에서의 제사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더 중요했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는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구원이란 율법을 잘 지켜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진정한 구원이란 그것과는 상관없이

삶 가운데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누리며 

사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르치신 신앙이란

더 이상 무엇을 이루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내 안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그 무엇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가르치시기 위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안식일 마저 일부러 어기시며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마가복음 2:27)


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두서없이 길어진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인간의 직업을 빼앗고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이 시대에 


과연 인간은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사뭇 진지한 문제를 고민하는 중에 있습니다


로마 시대의 예를 통해서 

인공 지능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리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교훈 삼았고


19세기 사진기의 발명을 통해서는

당시의 화가들이  어떻게 이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더 미술계를 발전시켰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인공 지능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도구는 기존의 도구를 뛰어넘어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도구입니다


인간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도저히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일을 즐기는 것' 입이다

'누리며 사는 일'입니다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행하며 기뻐하는 일은

인공지능이 하지 못합니다


인공지능은 목사들이 하는 것보다 훨씬 정확하고 빠르게 

성경을 주해하고 설교문을 작성하고

진리를 가르치며 설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설교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인공 지능은

목회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도움을 주며, 

서로 사랑하며

함께 느끼는 행복함을 

인공지능은 누릴 수 없습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

당시 사람들은 바둑학원에서 프로 기사를 꿈꾸며 

바둑을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염려하였다고 합니다


너희들 아무리 훈련해도 결국 알파고를 못 이길 텐데 

뭐 하러 공부하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풀이 죽어있을 줄 알았던

학생들의 대답이 의외였다고 합니다


‘알파고는 바둑을 이길 줄은 알아도

바둑을 즐길 줄은 모르잖아요’


‘바둑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바둑판에서 세상을 경영해 볼 수 있어요

바둑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하더랍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는 

어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인생을 살아간다면 전혀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함이라면

인공지능 로봇에게 나 대신 살아가라고 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삶은 오직 나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소풍길입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불고 

때로는 날이 저물어도


그 모든 것을 마음껏 경험하고 

마음껏 누리다가  

마침내 하나님 나라 

본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삶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나, 공중 나는 새처럼

그저 인생을 누리다가 


하나님 계신 곳으로 다시 돌아가면 그만인데

무슨 염려가 있으며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습니까?


인공 지능 또한 그 인생길에 

또 하나 경험해 보라고 

추가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선물은 쓰는 사람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쓰이게 마련입니다


챗 GPT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챗 GPT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귀한 선물 사용하듯이

선하게만 사용한다면

챗 GPT는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저 또한 목사로서

하나님의 선물인 챗 GPT를 잘 활용해서

목회하는 즐거움을 더욱더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나님은 정말 부자를 싫어하실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