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비유가 아닌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라는 말씀입니다
즉 성경 속의 하나님은 영입니다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 또는 숨결과 어원이 같습니다
바람이나 숨결이 그렇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앞에 자신을 드러낼 때면
천둥, 바람, 불 같은 것으로서
자신의 위용과 능력을 보여주고
어떤 때는 꿈을 통해서
어떤 때는 환상을 통해서
또 어떤 때는 외부에서 들리는 음성이나
천사를 통해서 자신을 현현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구약성서의 기록들은
하나님의 실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상징을
보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건 아닙니다
가령 아브라함에게는 사람의 모습으로
또 모세와는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현현하는 한 방법으로써
나타난 것일 뿐 하나님의 본래 모습이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이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표현하신 것을 두고
하나님은 사람의 형상과 비슷할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외적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본성을 뜻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자들의 공통된 해석입니다
이렇듯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섬겨야 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섬기는 대상이 없이는 종교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섬기고
이슬람교는 알라를 섬기고
힌두교는 브라흐마와 비슈누, 시바신을 섬깁니다
하다못해 유교조차도
공자나 조상신을 섬깁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예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늘 말씀드리지만
기독교의 예수님은 섬김의 대상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예수님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사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밝히는 작업이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단순한 작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존재이지만
하나님이란 존재는 그 어떤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복잡하고 난해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설명하는 일 또한 어느 정도 장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만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시자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하나님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할 뿐
하나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유일자이십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으로 모든 존재물을 자기 안에 창조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며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는데
하나님이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기인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이러한 매우 독특한 신론에서부터
피조물로서의 모든 인간은
당연히 그의 말과 의지를 따라야 한다는
교리가 자연스레 나오게 된 것입니다
중세에 가장 탁월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 칼빈과 함께 기독교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생에 걸쳐
하나님은 무엇인지.. 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은
하나님은 '있는 자' 또는 '존재 자체'라는 것이었습니다
중세의 대표적인 신학자가 하나님을
이러한 철학적 개념으로
인식했다는 것이 조금은 생소할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 같은 생각은 지극히 성경적인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선 먼저
하나님이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불려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이야 말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고대 중동에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에는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 있고
그의 아내 사라의 이름은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의미입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건져 올린 자'라는 의미이며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목을 잡다' 등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특징 또는 삶의 목적을 나타냅니다
때문에 중동에서 시작된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은 '엘'입니다
이슬람에서 하나님을 뜻하는 '알라' 역시 엘과 같은 말입니다
엘에서 엘 샷다이, 엘 올람, 엘로힘 등 하나님을 부르는 많은 이름이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이름들은 모두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붙인 명칭일 뿐(그들의 견해일 뿐)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직접 밝힌 이름은 아닙니다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통해서는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신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기 3장 14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선뜻 자기 이름을 밝히시는데
그 이름이 그 유명한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입니다
이 말에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흐예'라는 말은
영어로 치면 I am이고
'아세르'라는 말은
일종의 관계대명사 같은 말이니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는
영어로 번역을 하면
I am who I am 내지는
I an that I am 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고 번역을 한 것이죠
정말 탁월한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유감스럽게도
이 번역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할 때 이 말에는
'강한 자', 나 '전능한 자'라는 말처럼
하나님이 하나의 실체, 즉 어떤 '존재물'인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에흐예'는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있음'을 나타내는 말에 불과합니다
영어 번역 I am 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는
그냥 '있음'을 나타내는 말일뿐
엄밀한 의미에서 이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있음은 그저 있음일 뿐이다..',
'나는 있음이다..' 뭐 이런 뉘앙스의
답변을 하신 것입니다
이름이란 본디 존재가 아니라 존재물에 속한 것인데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물(실체적 대상)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계시하셨기 때문에
하나의 존재물처럼 인식되는 오해가 생겨나게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일은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을 향하고자 하는 원초적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나 '근원적인 존재'를 망각하고
한낱 존재물에 집착하지요
의심 많은 도마를 한번 보세요
자신의 손가락을 예수님의 못 자국 난 상체에 넣어보지 않고는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도마에게서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보다는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존재물'을...
다시 말해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더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성이지요
우상숭배란 별거 아닙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개념화할 수 없는 하나님을
자신이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신앙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사실 여호와라는 말,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련된 가장 뚜렷하고도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당신 누구요?'라는 질문에
'나는 사람이오' 이렇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질문자 역시 동일한 '사람'인데
'나는 사람이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에 서로의 '다름'을 전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당신은 무엇입니까?' 묻는 질문에
'나는 존재다', '나는 있음 자체이다' 이렇게 대답한 진정한 의미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
'너는 존재가 아니라 한낱 존재물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존재물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재로서...
인간을 존재물로서 파악한 것...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메꿀 수 없는 간격을 드러낸 것이
바로 모세가 파악한 하나님 개념의 핵심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고
인간을 포함한 그 밖의 만물은 한낱 '존재물'로서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거룩하다'라는 말은 '카도쉬'인데
'구분된', '분리된'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존재물'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인간과는 전혀 달라서
인간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저 존재합니다
어디에 존재하지 않고
어디에나 존재하십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사용하는 '... 는 존재한다'라는 술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존재와 존재물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지만
늘 혼동되어 사용했기에 그처럼 혼란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존재'와 '존재물'은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존재란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존재물은 변합니다
그래서 사실 '존재'란 말은 '진리'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진리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양 철학에선(그리스 철학)
이 존재를 이데아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에서는 '이데아' 만이 진정한 존재이고 진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서양 철학 전통은 (플라톤의 철학을)
신학에 접목시킨 중세 신학은
이데아의 자리에 하나님을 놓습니다
그래서 자칫 기독교 신학을
하나님과 인간, 선과 악,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이런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되면 완전히 잘못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만물의 궁극적인 근원인 하나님에게
이름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름이란 본질이 무엇인지 이미 파악된 존재물에게만 붙일 수 있습니다
만물의 궁극적인 근원인 하나님에게는
그분을 규정할 어떤 본질이 따로 없습니다
어떤 것에게 본질이 없다는 것은
그것을 파악할 수도 없고
그것에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신학자로 평가되는
어거스틴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분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존재'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