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의 결혼식이었다. 가기 싫었던 이유는 아버지를 봐야 해서다. 아버지와 크게 싸운 후 명절에도 잘 안 가고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왜 싸웠는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그의 가부장적인 태도와 불통인 것들이 지금껏 쌓여왔던 게 터졌을 테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쓴 폭력은 용서받을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만 본가를 나오고 동생들은 그냥저냥 살고 있다.
이런 가족행사 때문에 그를 마주쳐야 한단 건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말고는 다른 친척 하곤 다 사이가 좋은데, 가서 숨 막히는 공백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주말을 맞이하는 것도 기쁘지 않았다. 하지만 날은 다가왔고 만나야 하는 시간은 카운트다운 되었다.
구월의 첫 시작이었지만 날은 한여름이었다. 끝까지 가기가 꺼림칙해서 버스 시간도 빨리 도착을 택할 것인가 조금 늦게 도착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빨리 도착해 버렸다. 강남의 한낮은 대기열로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삼촌에게 인사하니 '가족은?' 물어서 '곧 와요' 말했다. 얼마 되지 않아 가족은 왔고 취해야 하는 스탠스는 데면데면하거나 아는 척하거나였다. 후자를 택하고 아버지에게 가서 '축의금 아버지가 내실 거니 저는 안내도 되죠?'라고 묻자 '그래도 내야지' 했지만 아마 친가 결혼식땐 액수를 크게 하더니 외가 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축의를 내지 않고 결혼식을 관람했다. 삼촌은 친구 같고 다정한 아빠여서 윽박지르는 일도 없었고 아이들과 대화를 하며 양육한 가정의 표본이었다. 그래서 친척동생은 주눅 들지 않았고 어디서든 할 말을 했으며 그게 명쾌해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나도 삼촌을 만나면 그의 소탈함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말이 듣기 좋았다. 아버지가 날 잘 인정하지 않았던 것과 반대였다. 그래서 집안 행사가 있으면 삼촌이 있으면 가고 싶었고 그는 항상 날 따듯하게 맞이해 주었다.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고 했을 때의 거부감과 다른 감정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했다. 오랜만에 큰딸을 보고도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고 인상을 쓴 채였다. 그게 강한 햇볕 때문이었을지라도 예전에는 그런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고 악착같이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허상이라는 걸 지난 세월 동안 배웠다. 하지만 앞서 저만치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작아져 있어서 그것도 짜증이 났다. 식사 때도 말 한마디 안 하고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모습도 싫고, 안부를 묻는 말을 안 하는 건 그러려니 했다. 내가 '아버지 당 있는데 떡 드셔도 돼요?'라고 물었을 때도 부답이었다. 그런 소통의 부재는 어릴 때부터 '못 들은 척하는 거야 못 들은 거야' 고민하다가 결국 나도 말을 걸지 않는 태도를 취하게 됐다.
그의 무심한 태도나 외골수의 모습이 내가 회사생활을 할 때 보이는 태도와 맞닿아 있단 생각을 하자 아득해졌다. 그가 하는 -들었는데도 못 들은 척하는 거, 쓸데없는 대화는 안 하는 건 평소에 (내가) 주변인을 대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었고 그렇게도 싫어하던 그의 특성이 나를 대변한다고 생각하자 너무 싫었다. 남과 같지 않으려고 나만의 고유성을 획득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결국 그가 보이는 독단적인 태도나 특정 과업에 빠지면 몰두하는 것과 (나는) 정확히 일치했다. 결국 나도 유전자의 대이음으로 태어났을 진대, 그와 분리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것이었다.
헤어지는 순간도 똑같았다. 그는 잘 가란 말도 없고 그 와중에 어머니는 바리바리 음식을 싸와서 가져가라고 했다. 무거워서 가져오기 싫었지만 또 꾸역꾸역 가져와서 냉장고에 넣어놨다. 가족을 만났다는 충족감보다 무언갈 끝내고 오는 해방감 또는 해소감이 드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