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유언을 읽는 시간
안녕하세요 음악 칼럼 쓰는 정은주입니다.
뉴스저널리즘에 연재 중인 제 칼럼 공유합니다!
누군가의 삶에서 쓰여진 마지막 이야기, 유언을 읽어보는 일,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종종 서양 음악가들의 유언, 혹은 위인들의 유언을 찾아 읽곤 합니다.
기분이 참 묘하기도 하고요. 워낙 제가 메멘토 모리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어떤 상황에서든 삶이 유한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복잡한 문제들이 아주 많이 걸러지는 경험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너무 예쁜 가을날, 누군가의 유언을 읽어보시길 추천.
저는 헨델의 유언을 소개했고요. 제 책에도 소개한 이야기입니다!
고맙습니다!
---------------------------------------------------------------------------------------------------------------------------더운 가을이 지나가는 중입니다. 문득 동네 아파트 화단에 떨어진 낙엽들을 보던 중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곧 겨울이 오는구나, 추운 계절을 맞을 채비를 해야겠구나 하고요.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의 쾌청한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지구의 계절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비단 필자 뿐만은 아닐 테지요.
짧아서 더욱 소중한 가을이 지나가면 어김없이 겨울이 올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우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한해를 마무리하게 되겠지요. 필자가 매년 체감하는 일 중 하나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는 점인데요.
시간이 너무 빨라 이 일도 저 일도 만족스럽게 마무리할 수 없었다는 불평도 참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별 소득 없는 불평은 도움이 되지 않지요. 그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보려는 자세가 나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이 아닐까 합니다.
헨델. 사진=위키피디아
이번 칼럼에서 필자가 준비할 이야기는 한해의 끝을 차분히 기다리는 시간 분명 도움이 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역사 속 위인들의 유언장을 찾아 읽고 생각해보는 일인데요. 나와 전혀 관계없는 역사 속 위인들이 쓴 유언장을 읽으며, 우리는 저마다의 사유와 성찰을 할 수 있거든요. ‘아 저 분은 이런 말을 유언으로 남겼구나’, ‘아 저 분은 의외로 이런 생각을 마지막까지 했구나’ 등에서 나의 마지막을 상상해보는 장면으로 자연스레 흐르게 되니까요.
필자도 종종 위인들의 유언을 읽습니다. 그때마다 늘 까먹고 있는 삶의 유한성을 깨닫기도 하고요. 참 위인들의 유언은 인터넷에서 혹은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쉽게 찾아보실 수 있는데요.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분들의 마지막 말 즉 유언장을 읽어보는 일도 분명 한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을 뜻 깊게 보내는 참 괜찮은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겨울과 한 해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동안 꼭 한 번, 역사 속 위인들의 유언을 찾아 읽으며, 오직 나를 위한 뜻 깊은 시간을 보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자 그럼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서양 음악가인 조지 헨델의 유언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영면 3일전까지 수정했던 헨델의 유언들
현재 영국 법원 아카이브에서 공개 중인 1727 헨델 귀화법의 첫 장입니다. 헨델은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과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는다, 영국 국법을 따른다 등의 내용에 서약해야 했습니다. 사진=영국국립아카이브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은 프로이센의 할레(현재는 독일 영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독일인이었지만, 영국으로 귀화했던 18세기의 코즈모폴리턴이기도 한데요. 하노버 왕가와 영국 왕실의 음악 교사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오페라, 오라토리오, 오케스트라, 실내악, 오르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는데요.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갔다면, 그는 시력을 잃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흐와 낙타를 수술한 이력이 있었던 외과 의사에게 눈 수술을 받았고요. 후유증으로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자신의 죽음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던 모양입니다. 우선 그가 즐겨했던 예술 작품 수집을 중단했고요. 그 작품 중 가치 있는 것들을 판매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는 평생 약 1만 점이 넘는 악기와 예술 작품을 수집했는데요. 하지만 더 이상 아름다운 예술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으니, 더 이상 그에게 필요없다 판단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르고요.
그는 세상을 떠나기 9년 전인 65세에 첫 유언장을 썼습니다. 이후 무려 5번이나 유언장을 고치며, 총 44개 사항을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요. 꼼꼼했던 성격의 그는 세상을 떠나기 3일 전까지 유언장의 내용을 다듬었습니다. 이토록 자세하게 유언장이 전해지는 그 시절의 음악가는 헨델이 유일합니다.
1757년 8월 4일 헨델은 25번째와 26번째 항목을 작성했습니다. 이 유언은 그가 수집한 예술 작품을 스스로 언급한 최초의 기록이고요. 그는 25번째 항목에 친구 찰스 제넨스에게 화가 발타자르 데너가 그린 〈늙은 남자의 머리〉와 〈늙은 여자의 머리〉를, 26번째 항목에는 자신의 친구 그랜빌에게 렘브란트의 한 작품을 선물한다는 조항을 썼습니다.
당시에도 렘브란트의 그림은 천정부지로 높은 가격이었는데요. 그랜빌은 헨델에게 무척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유언장이 시작됩니다.
신의 이름으로 아멘.
인간 생명의 불확실성을 고려하는 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신을 따르는 방식으로 이것을 나의 의지로 삼습니다.
유언장의 첫 번째 항목은 1750년 6월 1일 헨델의 하인으로 일하던 피터 르 블론드에게 ‘나의 옷과 리넨을 남긴다’고 적었는데요. 두 번째 항목도 같은 날 피터 르 블론드에게 300파운드스털링을 지급하겠다고 적었고요. 아쉽게도 헨델보다 피터 르 블론드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지만요.
세 번째 항목은 1750년 6월 1일 크리스토퍼 스미스에게 ‘나의 큰 하프시코드, 나의 작은 하우스 오르간, 나의 악보집’을 준다고 적었습니다. 헨델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 요한나 프리데리치아 플로어켄에게는 1750년 6월 1일 ‘유언장에 적힌 내 재산의 모든 나머지를 준다’고 적었고요.
헨델의 조카 요한나는 유언장의 단독 집행자 역할을 맡았는데요. 참 발타자르 데너는 헨델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입니다. 유독 헨델은 그에게만 유산을 남기지 않았고요. 아마도 그의 초상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다음은 헨델이 쓴 유언장의 마지막 말입니다.
내가 죽은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수 있도록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허가를 바랍니다. 내 장례 관련 사안은 에미얀드가 맡습니다. 만약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경우 600파운드를 초과하지 않는 금액 안에서 기념비를 제작하기를 희망합니다.
헨델의 바람은 이뤄졌습니다. 그가 간절히 원했던 곳,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남쪽에 묻혀 영원한 영국인으로 잠들었거든요. 그의 장례식은 1759년 4월 20일 금요일에 거행되었고요. 약 3천 명 이상의 조문객이 참석했습니다. 이날 장례 미사에서는 영국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윌리엄 크로프트의 〈장례 미사곡〉이 연주되었습니다.
| 참고 도서 『알아두면 쓸모 있는 클래식 잡학사전』 정은주 지음, 해더일 출판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