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쓴 쇼팽 추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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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 크비아트코프스키 作. '죽음을 맞이하는 쇼팽'(1849) 왼쪽부터 알렉산데르 옐로비츠키,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 마르첼리나 차르토리프스카, 보이치에흐 그지마와, 테오필 크비아트코프스키.
오늘(17일)은 프레데리크 쇼팽(1818~1849)의 기일(忌日)입니다. 그는 1849년 10월 17일 프랑스 파리 방돔 광장 12번지의 2층, 호화롭지만 낯선 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음 날 그의 시신은 해부학자 장 크루베이이에 의해 심장 적출 수술을 받았고요. 약 2주 후인 10월 30일에 파리의 마들렌 성당에서 쇼팽의 장례미사가 우여곡절 끝에 열렸습니다. 그의 시신은 파리의 페르 라 세즈에 묻혔고요. 쇼팽은 짧은 생을 마치고, 영면에 들었습니다.
참, 그의 심장은 코냑을 채운 유리병에 담긴 채 약 50년간 정처없이 떠돌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에 압수되기도 했고요. 그러나 결국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교회에 무사히 안장되었지요. 현재 파리와 바르샤바에 위치한 그의 두 무덤에는 그를 추억하는 음악적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쇼팽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 어떤 연극배우보다 재미있다”, “유머가 많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아마도 쇼팽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치면 ‘인싸’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쇼팽이 평소 친구들 사이에서 농담을 잘했다는 기록만으로 지레짐작한 것은 아니고요.
실제로 그의 장례식이 약 2주 가량 늦어진 일에 대해 곱씹다가 내린 결론 중 하나였어요. 쇼팽은 친구들에게 즐거운 웃음을 주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의 친구들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걸요. 쇼팽을 아끼던 친구들은 그의 장례식을 위해 무척 애를 썼거든요.
쇼팽의 장례식이 2주 가량 늦어진 까닭은 모차르트 <레퀴엠> 때문이었습니다. 평소 쇼팽은 존경하던 음악가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자신의 장례미사에서 연주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알렸거든요. 그러나 그의 장례 미사 장소로 정해진 성 마들렌 성당 측에서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장례미사에서 연주할 수 없다고 거절했어요. 그 이유는 <레퀴엠> 연주에 반드시 필요한 여성 성악가들이 성당에서 노래할 수 없다는 교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쇼팽의 마지막 원을 들어주고자 했던 그의 친구들은 성당 측에 강력하게 <레퀴엠>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파리 대교구의 허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단 교회 측은 여성 음악가들은 제단 뒤 장막 뒤에 숨어서 노래하는 조건을 걸었지요. 당시에도 이 사건은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큰 화젯거리였습니다.
쇼팽의 장례미사가 늦춰진 이야기를 읽으며, 필자는 쇼팽이 친구들에게 의미 있는 친구였다고 다시금 느꼈습니다. 조국 폴란드을 떠나 타국살이 중이었던 '싱글남' 쇼팽의 친구들은 마치 자신들의 가족처럼 쇼팽의 마지막 배웅에 최선을 다했다는 인상을 받았으니까요.
피아노 음악과 서양 음악의 역사를 쓴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인 쇼팽은 전 세계에 두루 팬층을 확보한 음악가 중 한 사람입니다. 지난 2015년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렸던 제17회 국제 프레데리크 쇼팽 피아노 콩쿠르 우승을 차지한 이후, 우리나라에서 더 더욱 쇼팽의 피아노 작품에 대한 열기가 올라가기도 했었는데요.
마침 이 가을, 바르샤바에서는 쇼팽이 지은 음악적 시(詩)가 매일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제19회 쇼팽 콩쿠르가 지구촌 쇼팽 팬들의 환호 속에서 열리고 있거든요. 이 콩쿠르는 단일 부문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콩쿠르이며, 참가자는 모든 단계에서 쇼팽의 작품을 연주해야 하는 이른바 정말 어려운 피아노 콩쿠르로도 유명합니다.
올해는 어떤 스타 피아니스트를 소개할지 전 세계 음악계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쇼팽 콩쿠르답게 쇼팽 콩쿠르 측은 쇼팽의 기일을 기념하는 무료 음악회를 엽니다. 그의 심장이 묻힌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교회에서요. 음악가의 기일을 기념하는 방법 중에 음악회만큼 좋은 것도 없을테니까요!
쇼팽의 기일을 독자 여러분께 의미있게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필자는 작곡가 헥토르 베를리오즈(1835~1864)가 쇼팽을 추모하며 쓴 글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베를리오즈도 쇼팽을 좋아하던 그의 음악적 후배였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음악 작품 작곡 뿐만 아니라 30년 가까이 파리의 《토론 신문》에 연재를 했는데요. 쇼팽의 장례미사가 열리던 날 긴 글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은 쇼팽에 대해 쓴 어떤 글보다도 값진 쇼팽에 대한 자료입니다. 필자는 베를리오즈의 글을 읽으며 쇼팽이 알려진 것보다 더 인간적인 사람이었음을 느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화를 잘 내는 예민한 남자였을지라도, 친한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유쾌하려 노력했던 모습을요!
장 베로 作 토론 신문(1889), 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쇼팽의 죽음
1849년 10월 27일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쇼팽의 죽음에 대한 글을 토론 신문에 발표했다.
길고도 끔찍한 고통 끝에, 쇼팽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의 죽음을 두고 ‘예술의 상실’이라 부르는 흔한 말을 쓰지 않으려 한다. 아아! 쇼팽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술계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의 쇠약함과 고통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피아노를 치거나 작곡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소한 대화조차 그를 지치게 했다. 그는 가능한 한 몸짓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려 애썼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그는 고립된 채 지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고립을 오해하고 비난했다. 어떤 이는 그것이 오만한 자존심 때문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음울한 성정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둘 다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통이 아직 견딜 만했던 시절의 쇼팽은 우울하기는커녕, 오히려 선량하고 장난기 어린 본성을 드러냈으며, 그것이 친구들과의 관계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더했다. 그는 자신이 지닌 비범한 재능의 본질이자 가장 큰 매력이었던 ‘유머’를 대화 속에서도 잃지 않았다.
그의 피아노 작품은 하나의 유파를 이루었다. 가장 독창적인 우아함, 예기치 못한 선율 전개, 대담한 화성, 그리고 리듬 악센트의 독립성이 모든 요소가 그가 창안한 완전한 장식체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의 피아노 연습곡들은 탁월한 기교와 가장 빛나는 영감이 응축된 걸작이다.
우리는 그의 마주르카들을 그보다 더 높이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들은 외적인 매력 덕분에, 특히 여성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았으며, 쇼팽을 유럽의 모든 귀족 살롱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로 만들었다. 그 우아한 선율의 화려함, 당당하면서도 미소 띤 태도, 천박한 환경에 대한 경멸, 억제된 열정, 신성한 속삭임, 화려한 공명이 모든 것은 그가 살던 세상의 세련된 예법과 일종의 유사성을 지닌다.
그는 뛰어난 연주 재능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환호를 즐기는 유형의 연주자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대형 연주회를 멀리했다. 그의 연주를 진심으로 듣고자 하는, 선택받은 소수의 청중만이 그를 피아노 앞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얼마나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던가! 얼마나 열렬하고, 또 우울한 몽상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쏟아내기를 좋아했던가!
그가 가장 흔쾌히 자신을 드러내던 시간은 대개 자정 무렵이었다. 살롱의 시끄러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정치 이야기의 장황한 논의가 끝나고, 수다스러운 이들이 더 이상 일화를 늘어놓지 못하고, 모든 술수가 벌어지고, 모든 배신이 저질러지고, 산문적인 현실에 모두가 염증을 느꼈을 때, 그제야 그는 몇몇 아름답고 지적인 눈빛의 조용한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시인이 되어 피아노 앞에 앉았다. 꿈속의 영웅들, 기사도적 기쁨, 떠나버린 조국, 언제나 정복당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사랑하는 폴란드의 슬픔을 노래했다.
그러나 이처럼 공연을 위해 그가 요구했던 조건들을 제외하면, 그를 설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의 명성에 자극받은 호기심은 오히려 그를 괴롭혔다. 우연히 그가 냉정한 세상 속으로 이끌려 들어갔을 때조차,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그곳에서 물러났다.
나는 어느 저녁, 그가 식사를 했던 집의 주인에게 쏟아낸 그 피투성이의 한마디를 기억한다.
식사가 끝나고, 주최자가 쇼팽에게 다가가 그날 초대한 손님들이 그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한 곡만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쇼팽은 처음에는 그 말이 진심임을 믿으려 했다. 그러나 상대의 말투에는 거의 모욕적인 강요가 섞여 있었다. 그제야 그는 기침을 하며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선생님... 저는... 너무 적게 먹었어요.”
그 한마디로 대화는 끝났다.
상당한 작품 수익과 레슨 수입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망명 생활에 익숙한 폴란드인들은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모차르트를 향한 한결같은 존경의 마음으로, 자신의 장례식에서 불멸의 레퀴엠이 연주되기를 원했다. 그의 훌륭한 제자 구트만 씨가 그의 마지막 소원을 받아들였고, 모든 준비가 즉시 이루어졌다. 아베 드 게리 대주교의 적극적인 중재 덕분에, 그동안 여성 합창단의 참여를 금지했던 규정도 해제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가오는 화요일 마들렌 교회에서 열릴 그의 장례식에서, 여성 합창단의 목소리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울려 퍼질 수 있게 되었다.
_《토론 신문》 1849년 10월 27일, 헥토르 베를리오즈가 기고한 칼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