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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Oct 21. 2022

추석 일주일 전이라 좋다

볕이 좋다.

부분적이나마 집 수리를 끝내고 난 후라 이 환한 볕과 선선한 바람이 더더욱 반갑다. 하늘은 말 그대로 푸르고 높은데 먼 데 산은 코앞에 와 있는 느낌이다. 산에 오르지 않아도 예전 느낌을 소환하며 산에 오르는 기분이다.


엊그제 집 수리하는 동안 작업 팀은 돌돌 말린 비닐을 풀어 집안 물건들을 덮었다. 작업자들의 손이 미치지 못할 자리의 물건들은 내 손으로 미리 덮어 두었었다.선물 꾸러미를 싸매고 온 보자기들을 빨아 모아 두었더니 이런 때 쓸모가 생겼다. 지난번 헌 옷 처분할 때 한 자루 딸려보내고 남아 있던 스물 댓 개 보자기를 모두 사용했다.


오늘 저녁부터 태풍 힌남노의 영향권에 든다는 예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좋은 날씨다. 힌남노는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입혔던 태풍 매미에 맞먹을 막강한 태풍이란다. 그렇다면 좀 더 서둘러 힌남노가 도착하기 전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될 일이다.


집 수리 때 사용하고 난 후 조심스레 걷어 한쪽 구석에 모셔 두었던 보자기들을 털고 빨아 널었다. 얇은 데다 흡습성도 거의 없으니 금세 마를 것이다. 이 좋은 날을 순식간에 끝난 보자기나 빨아 너는 일로 만족할 순 없다. 여름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으니 좀 더 이용할 것 같은 큰 흰색 타월들과 얇은 이불 두 채도 빨았다.


더 빨아 널 것이 없는지 뒤졌으나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 좋은 볕을 제대로 쓸 곳을 찾지 못해 이대로 흘려버린다는 게 안타깝다. 끝난 줄 알았던 장마가 또 시작된 데다 그러고도 자주 내릴 비에 마음까지 젖은 탓이다. 아니 햇볕만 보면 내 마음은 언제나 그렇다.





이번 추석에도 두 딸 얼굴을 볼 수 없겠다. 지난해까지는 코로나19가 수그러들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번 추석엔 코로나19는 다소 수그러들었다지만 3차 백신 접종까지 마친 첫째가 얼마 전 코로나 확진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나도 남편도 딸들 보고 싶은 마음이야 여느 부모와 다를 리 없다. 하지만 어떤 후유증이 남을는지 알 수 없는 감염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 번 걸렸다고 안심할 코로나도 아니다. 두 번 세 번 걸리는 이들도 있다니 백신의 효과에 의문을 갖게 한다. 더구나 이번 추석 연휴를 이용하여 첫째는 지금까지 해 온 일의 중간 결산을 봐야 한다.


추석을 앞두고 딸들에게 엄마 집에 오지 말라고 미리 알렸다. 죄송할 이유 없는 딸들이 죄송해 하고 감사한 마음을 선물과 용돈과 함께 보내왔다.


첫째가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내일 점심 같이 먹을 시간 되는데 오실 수 있어요?"

"그래, 아빠랑 같이 갈게."

"뭐 드시고 싶으세요? 예약해 둘게."

점심이라도 함께 먹을 시간을 내려고 애쓴 티가 나는 첫째에게 고맙다.





내일 토요일은 내 생일이다. 내 생일 무렵에 태풍이 불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비가 온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역대급 태풍이 예정되어 있다. 다행히도 내일 서울 쪽엔 비 예보가 없다. 오래 전부터 내 생일 무렵에도 태풍이 불긴 불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 상대적으로 태풍 기운이 약했을 뿐이리라. 언제나 날씨는 말 그대로 끝내주게 좋은 추석 일주일 전이었다. 


추석에도 만나기 어려운 첫째와 점심 약속이 잡혔다. 생일에 남편과 둘이 조용히 텃밭에 들러 풀이나 뽑을까 생각했었다. 생일을 풀 뽑을 날로 정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우울했다가 이내 생일날에 맞춰 풀 뽑으러 온 주인에게 내 텃밭과 비루먹은 듯 자라는 작물들은 고마워 눈물이라도 흘리는 건 아닐까 싶으니 웃음도 나왔다. 하지만 첫째와 점심 약속을 하고 나니 마음이 갑자기 바빠졌다. 추석에도 밥 한 끼 같이 못 먹는 딸을 위해 뭘 좀 만들어야겠다. 내 생일을 스스로 축하할 겸 딸에게도 먹일 겸.


미역을 물에 담그고 불고기를 쟀다. 약밥도 만들어 가면 좋겠다. 찹쌀을 씻어 물에 불리며 미역을 바락바락 주물러 씻어 잘랐다. 요즘 미역은 모래알이 없어 좋다. 예전 같으면 미역을 열 번도 헹궜을 일을 끓는 물에 그냥 넣으라는 조리방법을 무시하고 서너 번 잘 건져 씻으면 된다. 참 편하고 좋은 세상이다.





막간을 이용하여 창고에서 꺼내 놓았던 물건들을 느릿느릿 정리했다. 아직 집안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를 먼지 등이 싹 빠져나갈 여유를 주자고 변명한다. 버릴 것들이 또 산더미다. 버리고 또 버리니 좁았던 공간이 조금씩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졸음이 쏟아지는가 싶었다. 그리고 이내 곯아떨어졌던 모양이다. 무려 1시간을 그것도 정리된 잡동사니들과 버릴 물건들 사이에서 곤하게도 잤다. 연중 2~3차례의 낮잠 중 그 한 단잠을 오늘 청한 것이다. 며칠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 피곤했을 만도 하다.


정신을 차리고 미역국용 소고기를 볶았다. 볶은 소고기에 씻어 건져둔 미역을 넣고 국물은 자박자박 짭짤하게 끓였다. 생수 한 컵 붓고 다시 끓이면 간이 맞을 만한 분량씩을 일회용 봉지에 담으면 된다. 미역국이 식을 동안 둘레길을 한 바퀴 휘 걸어 돌아왔다. 바람은 서늘한데 등줄기에선 땀이 흐른다.





약밥이 다 됐다고 압력솥이 칙칙거리는데 인기척이 났다. 현관문을 여니 기다리던 자두가 도착했다. 하루 늦어질 수도 있대서 오늘 도착하면 자두 좋아하는 첫째에게 가지고 갈 수 있기를 바랐더니 바란 대로 이루어졌다.


중간 크기 55개 택비 포함 3만 원. 이웃 블로그에서 알게 된 별복(별빛촌복세상)농원 자두 추희다. 중간 크기라는데 내 눈엔 알알이 모두 대자처럼 보인다. 자두가 담긴 봉지 그대로 냉장고에 넣었다.


식은 불고기와 미역국을 일회용 작은 비닐봉지에 담고 묶어 일부는 냉동실에 일부는 김치냉장고에 넣었다. 한동안 입짦은 첫째의 입을 즐겁게 해 주기를 바라면서.


내 엄마 생각이 났다. 눈시울을 붉히며 잠시 내 엄마와 혼잣말을 나눴다. 엄마에서 엄마로 이어지는 딸들의 내력이 붉은 서녘 노을을 배경으로 실루엣처럼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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