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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Jul 04. 2024

시력을 잃은 덕분에 발견한 세상

뜻밖의 평안이 가슴에 스며들다


우리 집안사람들 중에서 안경 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도 원래는 시력이 항상 1.5 정도여서 안경 낄 일이 평생 없을 줄 알았다.


대학교에 복학한 후 한 후배로 인해 카페에서 공부하는 매력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어두운 조명 아래 매일 밤 새가며 공부하다 보니 2년도 채 되지 않아 시력은 1.5에서 0.1이 되었다. 내가 눈이 나빠질 거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세상이 흐릿하게 보여도 잠시 피곤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말았다.


미련하게도 티비 속 자막이 두 개씩 겹쳐 보이는 정도가 되어서야 안과에 가 볼 생각이 들었다. 안과에 가면서도 심각성을 느끼진 못했다. 무슨 질병에 걸렸겠거니, 간단한 안약 정도만 처방받고 말겠거니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검진해 보니 별다른 이상증세는 없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멀쩡했다. 단지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진 것뿐이었다. 안경은 그렇게 20대 후반부터 끼기 시작했다.


사실 안경을 끼기 전엔 안경 낀 느낌이 궁금해서 한 번쯤 껴보고 싶긴 했었다. 근데 막상 안경 끼고 살아보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수술이라도 해서 안경을 끼지 않은 채로 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라식했다가 시력이 돌아온 친구도 있고, 안과 선생님들이 안경 끼고 있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서 차마 수술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고로 안경은 앞으로 계속 쓰며 살 거라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근데 코로나가 한창 유행할 땐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마스크와 함께 안경을 착용하면 렌즈에 김이 서려서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튜브 검색을 통해 각종 수단을 동원해 봤지만 다 소용없었다. 내 안면구조가 특이한 건지 숨결이 유독 거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숨을 쉴 때마다 세상이 흐려지는 건 도통 막을 도리가 없었다.



사진 출처 by @oda_studio__ 깡소


어느 날 길을 걷고 있었다. 그날따라 유독 렌즈에 김이 많이 서렸다. 마스크 윗부분을 접어도 보고 코에 닿는 부분을 꾹꾹 눌러도 봤는데 김은 어김없이 올라왔다. 안경을 끼지 않으면 그나마 사람들 실루엣 정도는 보였는데, 김이 서리면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안경을 끼는 게 안경을 끼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했다. 그래서 안경을 벗어버렸다.


그런데 뜻밖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온 세상이 뿌옇게 보이니까 기분이 묘했다. 세상이 흐리면 모르긴 몰라도 불안하고 기분이 좋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흐릿한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눈앞의 모든 게 자세히 보이질 않으니, 쉼 없이 판단하는 마음의 공장이 멈추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뜻밖의 평안'이 찾아온 것이었다.


심신의 평화를 위해 마음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자 노력하는 편이지만, 항상 눈에 뭔가가 포착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판단을 일삼곤 했다. '저 사람은 옷을 왜 저렇게 입었을까', '저 사람은 인상이 정말 안 좋네', '돈 많게 생겼다' 등등. 근데 눈앞이 흐려지니까 그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근거 없는 잣대로 저울질하지 않으니 더할 나위 없는 안온함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대략 보이는 세상'은 그야말로 또 다른 세계였다. 눈앞의 현상이 흐려질수록 다른 무언가가 또렷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가장 가깝게 있지만 평소에 신경을 잘 쓰지 못하던 내면의 상태 같은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라도 하는 듯이.


그 후로 난 가끔 '흐린 세계'가 필요할 때마다 일부러 안경을 벗는다. 특히 운동에 집중하거나 뭔가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할 때면 그만한 환경이 없다.


시력을 잃은 건 안타깝지만, 그 덕분에 못 보고 지나칠 법한 세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세이 출간 소식
'사회적 통념을 극복하면 행복한 결혼생활이 보장된다.'

독서모임에서 만나, 돌잔치홀에서 결혼하고, 각방을 쓰며, 양가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지 않고, 서로를 배우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결혼생활을 독자들에게 내보임으로써 결혼과 관련된 각종 고정관념을 깨뜨리고자 책을 썼습니다.

결혼하면 고생길로 접어든다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정해진 틀’에 자신들의 삶을 끼워 맞출 필요는 없으며, 결혼의 본질은 ‘서로 잘 지내는 것’이라는 점을 일깨우고자 저와 아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옮겨 쓰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만의 남다른 결혼생활이 많은 분들에게 결혼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한 사유를 해볼 수 있는 촉진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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