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샘플 편지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2층으로 내려갔다가, 3층으로 올라오면서 기어코 발을 헛디디고야 만 책방지기 정란입니다. 혼잣말로 “조심했어야지” 셀프 주의를 주고도, ‘그래도 내려갈 때 헛디딘 게 아니라 다행이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저의 속성입니다(속성은 사물의 성질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다른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아 고집해 봅니다). 실수를 인지하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만 끝내는 보듬어 줍니다. 삶의 방향을 다시 ‘긍정’으로 돌리죠. ‘그럴 수도 있지’ 이건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가 없었다면 저는 세계실수대회 6943관왕을 차지하고 장렬히 전사했을 것입니다. 6943만이라고 썼다가 지웠습니다. 자괴감에 빠져 그때까지 살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엮인 실수나 제법 큰 실수일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지’ 다음 단계에서 또 자괴감이 찾아옵니다. ‘오늘 잠은 다 잤다’ 한숨이 새어 나오죠. 그럴 때면 신뢰하는 이에게 실수를 털어놓습니다. 대체로 저보다 지혜로운 그들은 놀라운 방법으로 마음을 토닥여 줍니다. “뭐 어쩌겠어. 될 대로 되라고 해. 별일도 아니야” 식의 조언도 있고,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정란 씨가 걱정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개의치 않을 수 있어요. 붓다가 그런 말을 했대요.” 식의 위로도 있습니다. 마음이 괴로운 와중에도 “저 알아요! 제가 맞혀 볼게요! ‘삶은 고해(苦海)다’ 맞죠?” 하는 것은 또 저의 속성입니다. (저는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온더블록’을 좋아합니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역시 퀴즈는 못 참죠). 그래서 붓다가 한 말이 뭐냐 하면, 고통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오케이! 그럼 난 고통을 놔줄 거야. 잘 가 고통아! 빠이 고통!” 그렇게 말하고 자정 전에 잠들었습니다. 일어나서 어제의 실수를 곱씹으며 이 편지를 쓰고 있고요.
오늘은 자연스럽게 실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겠네요. ‘겨우 이런 게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갈 정도의 실수냐’ 하는 식의 논란이 있었지만, 선수의 정신적 충격과 그에 따른 감동적인 이야기가 화제가 되어 가산점을 받았던 실수들을 소개할게요. 물론, 기세등등 선수권대회에 출전한 것들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2011년. 21세의 나이로 유럽배낭여행을 떠났을 때입니다. 유럽이고 나발이고 혼자서 여행을 떠난 것 자체가 처음이었는데, 그게 유럽이었다니(아, 유럽여행 자체는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강)’ 항목에 체크되는 바람에 후보에서 떨어졌어요. 대신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 원주에 다다라서야 여권을 놓고 왔음을 깨달았는데, 그건 수상까지 했던 일입니다). 프랑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내린 저는 ‘횡설수설’ 같은 몸놀림을 보여주며 지하철을 타러 갑니다. 길을 잘 찾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제 몸보다 커다란 캐리어가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죠.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캐리어는 개찰구에 끼어 나가지도 빠지지도 않고 수많은 행인의 길을 막았습니다. 대체로 그런 때의 캐리어들이 ‘어쩌라고’를 시전하고 버티니까요.
제 힘으로는 도무지 역부족이라고 판단. ‘에라, 모르겠다’ 안드로메다로 환승해야겠다 마음먹기 직전, 크고 검은 손이 다가옵니다. 올려다보니 어느 흑인 남성이 서 있습니다. 신장이 190cm는 되는 것 같고 머리카락은 짧은 곱슬입니다. 그가 제 캐리어 손잡이를 잡습니다. 처음 떠나는 여행에 기대만큼 걱정도 많았던 저는, 한국의 유럽배낭여행 커뮤니티에서 사전 조사를 해 온 사람입니다. ‘흑형을 조심해야 합니다. 무조건이요’ 저는 제 작은 손에 힘을 꽉 줘 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의지가 보이는 결연한 몸짓입니다. 그 순간 남성이 씨익 웃는데, 그건 결코 조심해야 하는 미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믿어야만 했고요. 저는 결코 항복하는 게 아니라는 항복 자세(우습군요)로 손을 뺍니다. 그는 커다란 캐리어를 뭐 팝콘 봉지 건네주듯 반대편으로 옮겨놓은 뒤, 처음보다 더 예쁜 미소를 남겨둔 채 유유히 멀어집니다. 저는 프랑스에 도착한 이래 처음으로 불어를 썼는데, 점점 작아지는 그의 등에 다급하게 소리친, 그러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모기만 했던, “Merci beaucoup(정말 고마워요)”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행 내내 단 한 번도 흑인을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삶을 여행하는 내내 말이죠. 그 순간 빠르게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경계해야 할 것은 흑형이 아니라, 흑인은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는 편견이라는 것을요(‘흑형’이라는 단어도요). 그런 식이라면 ‘세계실수선수권대회에 나가고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책을 좋아하는 여자는 무조건 조심하세요’ 같은 말이 루머처럼 퍼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캠핑지인 브니에르(Vaunieres)까지 가는 기차를 미리 예매해두지 않아 오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고요. 열차 출발 3분 전까지도 탑승구를 찾지 못해 온몸의 땀샘들이 궐기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때도 한 아저씨의 도움으로 무사히 기차에 탑승했습니다. 불어는 무슨 한국어도 안 나올 판이어서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달려갔습니다. 다짜고짜 티켓을 보여줬더니, 그는 저만큼이나 아연실색한 얼굴로 저와 티켓을 번갈아 확인했습니다. 제가 제정신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저씨는 제 캐리어를 들고 뛰고, 저는 배낭끈을 손에 쥔 채 전속력으로 달렸습니다. 아저씨가 오른손 검지를 펼쳐 문을 가리켰고, 저는 기차에 탑승했습니다. 기차는 바로 출발했고, 아저씨는 땀 닦을 새도 없이 제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날의 파리 날씨만큼 화창하게 웃으며, 커다란 엄지를 펼쳐 따봉을 날려 주었습니다. ‘엘리스(Elise). 이번 여행 내내 너에겐 좋은 일만 생길 거야. 실수해도 어때. 흑인도 백인도 빨주노초파남보인도 모두 너를 굽이 살필 거야’ 그런 응원으로 시작한 여행이었습니다.
세계실수선수권대회에 숨 돌릴 틈도 없이 출전했던 건 스리랑카에서 살았던 2년 동안입니다. 그 이야기들도 때가 되면 들려드리게 되겠죠.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실수들이 쌓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오래된 기억을 꺼내다 보니 목이 타 컵을 찾습니다. 이런, 2층 정수기 옆에 두고 온 모양입니다.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2층으로 내려갑니다. 물컵이 보이지 않습니다. 컵은 어디로 간 걸까요? ‘3층엔 없었잖아’ 생각하며 다시 조심조심 3층으로 올라옵니다. 컵이 왜 저기에 있는 걸까요?
크고 작은 실수는 평생 저를 따라다닐 모양입니다. 이런 쪽으로 인기가 좋은 것은 좀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귀엽고 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살기가 퍽퍽하니까요. 그런데 또, 이러니까 계속 실수를 달고 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기특하지 않나요?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아주 조심스레 계단을 오르내렸다는 사실이요.
“사장은 차분한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애” 저의 친한 친구, 56세 K 씨가 얼마 전에 제게 했던 말입니다. 선반을 달기 위해 수평계가 달린 삼각대를 가게에 펼쳐 놓았을 때입니다. 왔다 갔다 하며 구도를 보던 저는 뒷걸음질 치다 삼각대를 발로 차고 맙니다. 삼각대 다리에 발이 걸리며 “으앗!”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숙련된 작업자 K 씨가 재빨리 뒤를 돌아봅니다. “조심해요” 그리고 다시 작업을 이어가죠. “아, 이게 있는지 몰랐네요!” 뻔히 봐 놓고도 잊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잠시 후 같은 실수가 재차 이어집니다. “사장은 차분한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애”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조심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가끔 듣긴 해요” ‘없다’를 ‘부족하다’로 바꾸어 제 부족함을 메꾸어 봅니다. 머쓱한 이들이 그렇듯 말이 길어지죠. “그래서 요즘 차분해지려고 아침마다 명상하잖아요” “33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되려고요?” 차분해지고 싶은 책방지기가 조금 발끈합니다. “그래서 21일 동안 하는 프로그램이라고요!” 적당한 타이밍에 웃는 법을 알고 있는 K 씨는 허허 웃고, 절에 들어가라는 조언을 남깁니다. 아직 오픈도 안 한 책방에 선반을 달고 있으면서 말이에요.
이틀째 아침 명상을 땡땡이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틀은 했으니 훌륭하다고, 그래도 이틀이나 미룬 것은 너무하다고 자체 평가를 내립니다. 어제는 세무서에 가서 ‘책방하리’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했습니다. ‘책방’과 ‘하리’ 사이에 쉼표를 찍고 싶었지만, 검색이 잘 되게 하려면 없는 게 낫다는 판단을 3초 만에 내렸습니다. 실수도 잘하지만 결단력도 좋다고 자체 평가를 내려 봅니다.
손님들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습니다. ‘책방하리 오픈 프로젝트’를 실수 없이 완수하기 위해서요. 벌써 두 번째 편지 작성이 끝나고, 샘플 편지는 단 한 통만이 남았습니다. 아쉬워하지 말아요. 네 번째, 다섯 번째 편지도 받기로 이미 다짐하신 거 아닌가요? 저는 통찰력이 좋은 편인가요? 고맙습니다. 긴 편지를 읽어주셔서, 그 자리에 그렇게 존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쓰는 동력이 되어 주셔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용기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신.
첫 번째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날은 종일 행복했습니다. 혹시 망설이고 있다면, 꼭 답장 보내주세요. 세 번째 편지를 보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매일 기다려주실 거죠? (저는 밀당의 고수인가요? 통찰력이 좋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