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란 Jan 19. 2024

[11월] 1. 아주 따뜻한 손을 가진 당신께

#영주독립서점 #책방하리 #편지하리 #펜팔

안녕하세요. 드디어 당신께 11월의 첫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11월의 첫날인 어제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숫자 1이 가지는 의미에 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 조금 더 게으른 하루를 보냈습니다. 게으를 수 있는 1일도 이제 많지 않을 테니까요. 매년 12월 31일이면 꽤나 비장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습니다. 내일이면 새로운 장이 펼쳐진다는 희망과 설렘도 있지만, 내일부터는 반드시 새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부담도 함께 왔었죠. 1월 1일. 어제까지의 무언가를 잊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지만, 이미 무언가를 잊느라 너무 힘을 쓴 사람에게는 지치기도 쉬운 날이잖아요. 은희경 작가의 『생각의 일요일들』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숫자의 편집에 속지 말기로 해요. 의도된 거짓말이 들어 있을 수 있어요. 가령 재촉이라거나 지나친 의미부여라거나.’ 그래서 저는 2일에 시작하는 ‘편지, 하리’가 더 좋답니다. 당신도 그렇게 느껴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1일에 일부러 조금 더 게을러지는 재미와 여유도 챙겨 보시면 좋겠어요. 손이 따뜻한 당신이 사는 일에 지치지 않으면 좋겠거든요.


저는 지난 일요일에 친구와 함께, 호랑이가 사는 수목원에 다녀왔어요. 수목원에 가게 된 경위는 이렇답니다.


친구: 오늘은 좀 잘 잤어? 라니는 아침에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 같네. 신기해:) 오늘도 좋은 하루!

책방지기: 간만에 제법 잤더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나 오늘 생일이니까 파티하자!

친구: 황당하지만 하루를 기쁘게 사는 기발한 아이디어네. 수목원이라도 예약해야겠군.

책방지기: 나 수목원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친구: 작은 초식동물의 뷔페랄까.


저는 건강상의 이유로, 또 얼마간은 동물과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건 지향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친구는 그런 저를 작은 초식동물이라고 부르죠. 저는 푸르고 싱그러운 수목원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친구는 그 사실은 모른 채 가서 풀이나 잔뜩 뜯어 먹으라는 의미로 저렇게 말한 거였죠. 의도야 어쨌든 서로 뜻이 통했으니, 우리는 다음 날 아침에 만나 수목원으로 향했습니다. 아쉽게도 토요일의 친구는 일에 묶인 육식동물이었거든요. 오늘도 푹 자고 내일도 새로 태어나라는 친구의 말에 설득 당한 저는, 그렇게 2023년 10월 29일에 새로 태어날 계획을 갖고 잠들었죠.


수목원으로 가는 내내 좋아하는 생일 노래들로 재생목록을 만들었습니다. 스웨덴 세탁소의 ‘Happy birthday waltz’, 이소라의 ‘생일 축하해요’, Ra.d의 ‘Happy birthday’, 커피소년의 ‘생일 축하해요’를 반복해 들으며 새로 태어난 기쁨을 누렸죠. 너그러운 친구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이불 같은 구름을 하늘에 띄워두고 매초 바뀌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수목원에 도착해 마침 50% 할인 행사를 하는 가격으로 입장권을 구매하고, 편의점에서 초콜릿까지 두 개나 챙겨 수목원에 발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생일 선물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선명함’ 필터를 씌운 것 같은 파랗고 맑은 하늘이 바로 머리 위에 있었거든요. 끝없이 펼쳐져 축복처럼 저를 안아줬거든요.

저는 작은 꽃들에, 친구는 물고기에 마음을 빼앗겨 각자의 속도로 수목원을 걸었습니다. 그날은 푹 자지 못해 실은 새로 태어나지 못할 뻔했던 저는, 자꾸만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놀랍게도 수목원은 마치 그런 저를 안다는 듯 곳곳에 누워서 쉴 수 있는 의자들을 설치해 두었지요. 저는 기다란 의자에 누워 소나무 숲 사이로 지나가는 배를 봤고요, 지나가면 그만일 것 같은 대화를 나누며 자주 웃었습니다. 그러다 일어나 숲길을 걷고, 다시 흔들의자에 누워 친구가 고른 글을 함께 읽었습니다. 자꾸만 소리 내어 읽어 달라기에 몇 번은 거부했지만, 지치지 않는 육식동물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죠. 글을 읽으며 자주 멈췄습니다. 웃음이 터졌거든요. “봐, 같이 읽으니까 얼마나 좋아. 같은 부분에서 이렇게 같이 웃을 수 있잖아.” 그걸 아는 사람과 친구 하지 않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지 않나요? 더 누워 있고 싶은데, 나를 흔들어주는 의자와 바람과 이별하기 싫은데, 친구는 또 저를 설득했습니다. “호랑이 보러 가야지. 호랑이 보러 안 갈래?”


그리고 비로소 그곳에 도착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호랑이숲 우리 앞에 풍선이 붙어 있었거든요. ‘HAPPY BIRTHDAY’ 저는 정말로 놀라 나자빠질 뻔했습니다. 풍선만큼 커진 눈으로 친구를 봤죠. “뭐야, 이거?” 친구는 말했습니다. “내가 수목원 예약한다고 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이거 뭐냐고.” “내가 예약했다니까?” “이게 무슨 일이야?” 저는 정신을 가다듬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기로 했습니다. “호랑이 생일인가 봐. 오늘이” “그게 말이 돼? 너 이 풍선을 오늘 단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응” “이 풍선이 오늘 단 걸로 보여?” 풍선 하나는 바람이 빠져 있었고, 호랑이숲 안의 가랜드는 색이 좀 바랜 것도 같았습니다. 그럼 이게 뭔가, 의아해하는데 호랑이숲 반대편의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Happy Birthday! 10.29. 축하 메시지를 적어 주세요! 10/29 당일 호랑이의 건강 상태로 인해 행사 내용에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야! 맞잖아! 오늘 호랑이 생일이잖아! 나도 생일인데!” 사실 별생각 없이 ‘수목원이라도 예약해야겠군’ 했던 친구는 말을 잃었습니다.


생일인 오늘, 나와 생일이 같은 호랑이를 만난 것입니다. 그것도 수목원에서요. 호랑이 ‘한’과 ‘도’에게 축하 메시지를 남기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도 편지를 썼습니다.


한.도 호랑이들아യ 나도 오늘 생일인데..

우리 오늘 만날 운명이었나 봐!

우리 오래오래 같이 건강하자!! 호랑해♡

-란-


쓰기 싫다고 버티는 친구도 초식동물의 등쌀에 밀려 펜을 들었죠.


‘한.도.란. 생일 축하해! 앞으로 건강하고 즐겁게… 어흥.’


친구는 제가 쓴 편지를 읽더니 뻔뻔하다는 한줄평을 남겼습니다. 제가 뻔뻔한가요? 저는 자유로웠습니다. 태어나고 싶은 날 태어나, 호랑이와 함께 생일을 맞는 것처럼 멋진 일이 또 있을까요? 숫자의 편집에 속지 않기로 해요, 우리. 마음에 드는 생일이 없는 당신이라면, 당신을 무척 기다려왔던 제가 당신을 만난 오늘을 생일로 하는 건 어때요? 선물로 따뜻한 음식을 먹고, 달콤한 차를 마시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드세요. 그럼 내일은 또 생일 같은 하루가 펼쳐질 거예요.


시선이 다정한 당신. 작은 초식동물이 쓴 일기 같은 편지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손이 따뜻한 당신. 시작하는 책방지기의 떨리는 손을 살갑게 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비록 한 걸음이지만, 작은 동물의 보폭으로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은 기특한 마음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책방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소중한 당신. 오늘도 꼭 건강하시고, 이왕이면 행복도 하세요.


-당신의 손을 맞잡은 책방지기 드림

매거진의 이전글 5. 드디어 책방이 열립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