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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Jan 28. 2024

[11월] 5. 겨울이 옵니다

#영주독립서점 #책방하리 #편지하리 #펜팔

어젯밤은 잘 보내셨나요? 영주에는 어젯밤, 한파주의보가 내렸습니다. 보일러를 든든히 틀어두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조금 쉬다가 혈압을 재고 침대에 누워 한참을 버티다 잠들었습니다. 하리쿠키와 함께 잘 때는 초를 셀 겨를도 없이 잠들었는데, 따뜻한 친구들이 없으니 마음도 자꾸만 식는 것 같습니다. 전화를 끊지 못하고 잠에 빠질 만큼 피곤했으면서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굿나잇클럽을 만든 혜천리의 책방지기 은섭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잘 먹고 잘 자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어요.


내일이면 입동(立冬)입니다. 겨울을 코앞에 두니 마음이 이상합니다. 계절은 착실히 돌아오고 시간은 끈기 있게 흐르네요. 게으르고 의지박약인 것은 저 하나일까요? 그러나 어쨌든 때가 되면 다 해내왔으니, ‘지금은 조금 더 쉬고 싶은가 보다’ 하며 제 편을 들어줍니다. 며칠 전부터 가끔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테이블 오른쪽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오늘 오후에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겁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이 그려진 2011년 일기장을 펼쳐서, 12년 전 입동에 나는 뭘 했는지 찾아봅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낙하하는 저녁』을 읽었군요. ‘어쩐지 재수 없는 내용이라 읽기 싫었는데’로 시작하는 일기입니다. 스물한 살의 저는 조금 과격했네요. 카페에서 책을 읽던 저는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가, 칸 안에 있는 한 아이의 말을 의도치 않게 듣게 됩니다. “엄마. 내가 나쁜 행동을 해서 나무가 되면 엄마는 어떻게 할 거야?” 엄마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아이를 안심시키는데, 아이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는 물 주면 되잖아!”


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나무가 되는 게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은 걸까? 아니면 그건 자신의 꿈속 이야기일 뿐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기에 태연했던 걸까? 나는 나무가 되어서야 그렇게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는 걸까? 때론 견디기 버거운 모든 일들에?’ 서른셋의 란이는 스물한 살의 란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알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대신 아이의 단순한 현명함 앞에 잠시 멈추어 섭니다. 나무가 되면 물이나 마시면 될 일이겠죠. 


내친김에 2012년 일기장도 펼쳐 봅니다. 붉은색 면 커버에 금박으로 에펠탑이 새겨져 있습니다. 2012년 입동은 11월 7일이었군요. 정이현과 알랭 드 보통이 함께 쓴 『사랑의 기초』를 읽었네요. 그걸 끝까지 읽고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왜 사랑의 기초인지 잘 모르겠다. 사랑에 기초와 심화 같은 과정이 있는 걸까’ 돌이켜 보면 저는 그 시절 연애에 몰두해 있었지만, 그중 사랑이라 할 만한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진짜로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2014년의 입동으로 가 보겠습니다. 2014년에도 입동은 11월 7일이었군요. 파란색 면 커버에 금박으로 새겨진 에펠탑. 2011년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프랑스에 단단히 취해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여름의 입동은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니, 전문을 옮겨 보겠습니다.


제목: 다시, 바람

가야 선생님과 함께 사무소에 다녀왔다. 활동물품 정산 마무리와 원터치 모기장 수령을 위해서. 정신머리 없는 캐릭터 잃을까 봐 그건 기관에 그대로 두고 귀가했지만(끄응…) 콜롬보 왕복 투어(?)는 생활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었다. 사무소 가는 길. 무슬림 아기의 볼에 있는 점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스리랑카 아기들은 점이 왜 이렇게 많지…’ 했는데 그게 다 못나 보이기 위한 트릭이었다니(두둥)! 가야 선생님 눈 밑에 눈썹이 붙어 있어서 떼 드렸더니 원망이 돌아왔다. 손등 위에 올려놓고 불면서 소원 비는 거란다. 맙소사. 6개월을 넘게 살고도 전혀 몰랐던 사실들에 충격이 몰려왔다. 놓친, 놓칠 뻔한 스리랑카의 이야기가 얼마나 더 있을까? 다시 켈라니야로 돌아오는 길. 가야 선생님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한국보다 스리랑카가 좋은 점은 뭐예요?” 깨끗하고 생활이 편리하고 맛있는 음식이 많은 한국. 그리운 이들이 사는 나라. 이곳에서 내 나라를 더욱 사랑하게 된 나였다. “과일! 음식도 싸요! 사람들도 친절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얘길 덧붙였다. “그런데요, 한국이랑 스리랑카의 비교를 떠나서, 저는 지금 스리랑카에 있는 게 행복해요” “왜요?” “지금 이때가 아니면 경험하지 못할 것들이잖아요. 스리랑카에 와서 불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럼 저, 그래도 잘 지내는 거 아닐까요?” 가야 선생님은 “선생님 힘든 일 있었잖아요…” 하며 경민 언니 얘기를 언급했다. 그래, 워낙 잘 잊는 탓(혹은 덕)에 금방 ‘난 힘든 거 없이 잘 지내는구나’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이지 불행하진 않다. 내 어려운 시간을 알아주는 동료가 있으니까. 창밖에서 불어오는 매연 섞인 바람 말고, 내 마음으로 다시, 싱그러운 바람이 들어왔다. 밝은 연둣빛의 잎사귀를 흔들면서, 살짝 땀이 난 이마를 간질이면서. 스리랑카의 역사도 문화도, 전설과 숨겨진 이야기들도 다 너무 알고 싶다. 자주 이렇게, 사랑스러운 바람이 불어주면 좋겠다.


에피소드. 커먼 룸에서 식사하던 중 가야 선생님이 말했다. “타루셔 앞에서도 이렇게 드세요?” 내가 많이 잘 먹는가 보다. 그렇다고, 방귀도 뀐다고 대답했다. 가야 선생님, 아밀러 선생님, 야쇼다 선생님이 동시에 경악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가야 선생님이 말한 한국 여자의 내숭이라는 거, 나한테는 없는가 보다. (책방지기가 덧붙이는 말. 가야 선생님 개인의 의견일 뿐, 딱히 차별적인 발언이라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스리랑카 켈라니야의 끼리밧고다에서 살았던 2년 동안의 사진을 보면, 도대체 뭐가 언제 찍은 사진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5월에도 11월에도 같은 옷을 입고 출근했습니다. 1월에도 3월에도 팔과 발등을 벅벅 긁으며 버물리를 발랐죠. 1년 내내 국산 바나나와 파파야를 먹으면서, 다만 망고와 망고스틴의 시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계절은 목마른 건기와 내내 젖어 있는 우기, 개강과 종강으로 나뉘었습니다. 아침이면 빗소리나 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고, 다람쥐와 도마뱀, 바퀴벌레와 개미, 박쥐와 생쥐와 함께 살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면 제일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절을 느끼면서 살 거야”


사계절과 24절기, 국경일과 각종 날들을 챙기며 사는 저를 놀라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이 우수라고 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게 뭐 하는 날인지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때가 되면 네이버에서 다 알려주는 것들이지만, 어쩐지 우쭐한 마음이 되어 줄줄 읊어 봅니다. 계절을 충실히 느끼며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편지를 쓰다 깜빡 잠이 들었고, 깨어나 저녁과 잠깐 통화를 했습니다. 뭐하다 잠들었냐는 물음에 “캐럴 틀어놓고 편지 쓰다가 잠깐 잠들었어” 대답했습니다. “멋있어” 저녁은 자꾸만 저의 별게 다 멋있습니다. “뭐가 멋있다는 거야” “이제 추워지니까 캐럴을 들으면서 계절감을 느끼는 게 멋있어” 이번에는 별로 우쭐해지지 않습니다만, 캐럴을 듣는 것은 역시 즐겁습니다.


편지에 쓸 수 있는 친구 얘기라는 게 매일 저녁이 얘기네요. 얼른 책방을 열어서 영주에서도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싶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저랑 친구 해 주시겠어요? 나이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저와 친구가 되면 좋은 점을 몇 가지 어필하면서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1. 평소에 나라면 절대 읽지 않을 것 같은 재미있는 책을 추천받을 수 있다. 마초맨 김저녁이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받은 『긴긴밤』을 읽은 것처럼. ‘수많은 긴긴밤을 함께했으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했다. 때로 나의 노든이 되어주었던 저녁에게 제법 깊은 애정을 담아’라는 메모를 붙여 주었고, 책을 다 읽은 저녁은 제멋대로 나를 ‘제멋대로인 펭귄’이라 칭했다.


이토록 넓어지고 아름다워지는 세계라니. 저랑 친구 해 주시죠.


2.책방 조직표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서 한 번 올려 보겠습니다. 저는 어떤 직책이든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


3. 계절을 놓치지 않고 보낼 수 있다. 봄이 오면 수목원에, 여름이 오면 계곡에, 가을이 되면 부석사에, 겨울이 오면 설산에 데려갈 생각입니다. 이거 어필 맞나요?


사실 아주 많을 텐데, 제 매력에 대해 곱씹으며 살지 않으니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어렵군요. 김저녁의 전화번호를 알려드릴 테니 연락해서 물어보세요. 그가 아주 멋지게 설명해 줄 것입니다. 010 8687 ...


추신.

독감이 유행인가 봅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 집에 돌아오면 손발을 꼭 씻고 치카치카를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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