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초 눈이 많이 왔다. 30여 년 전에 회사동료들과 처음으로 몇 시간 용평리조트에서 스키를 탔었다. 어렴풋이 그때 탔던 초보자 코스를 기억해 냈다. 나름 자신감이 있었다. 겨울이 가기 전에 갑자기 스키를 타고 싶었다. 아직은 운동신경이 나름 살아 있을 것 같아 더 늦기 전에 용감하게 도전해 보기로 했다. 동행인이자 나의 보호자 강사님인 막내딸이 3일 전 곤지암스키장에 예약(4시간)을 했다.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 몇 번 초보자용 실습 강의를 시청했다.
매표소 입구
화담숲은 봄과 가을에 두 번 왔었다. 화담숲 바로 옆 스키장에 도착하여, 지하 1층 대여장소에서 스키 신발을 빌렸다. 그 신발이 난생처음 보는 것 같이 왜 그렇게 생소한지! 발이 들어가지 않아 1cm 더 큰 신발로 빌렸다. 라커에 신고 온 신발을 보관 후 우주화 같은 스키화를 신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대여장소에서 스키플레이트와 스틱을 받았다. 또 문제가 발생하였다. 스키신발을 스키플레이트에 장착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으나 계속 실패했다. 낑낑대는 모습이 안쓰러운지 근무하시는 분이 와서 도와주었다.
스키장 입구
오리처럼 뒤뚱대며, 겨우겨우 리프트 타는데 까지 이동하였다. 시간이 아까웠다. 연습과 준비운동도 할 겨를 없이 “초중급“이란 팻말이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면 초보자용 코스도 있겠거니 했다. 의심 없이 바로 줄을 서서 약 1.8km 가까운 장거리를 고공 리프트로 이동 정상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하강하는 곳에 ”초급“코스 팻말이 안보였다.
리프트에서 본 스키장
그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코스를 잘못 선택한 것이었다. ”초중급“이란 코스의 의미는 ”중급(828m)+초급(757m)”였다. 즉, 출발은 중급코스지만 활강하여 내려오다 보면 완경사의 초급 코스가 나온다는 의미였다. 잘못을 알았으면, 제일 중요한 것은 기본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다시 리프트를 타고 내려가서 제일 우측의 초급코스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중급 코스 (출발지 근처)
그러나, 갑자기 사나이 오기가 발동하였다. 이왕 지사 이렇게 된 것,끝까지 도전해 보기로 했다. 여기까지 온 시간이 아까웠다. 에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A자 만드는 연습을 몇 번 한 후에 제일 왼쪽 중급코스로 이동했다. 출발하려고 보니, 너무 급경사였다. 다리가 벌써 후들후들 떨렸다. 주변에 스키 마니아들은 즐기면서 신나게 타고 내려갔다. 겁나기도 하고, 안전사고나 방해가 될까 봐 울타리 쪽으로 바짝 붙어 울타리 그물망을 잡고 이동했다. 울타리 쪽은 눈이 별로 쌓여 있지 않아 얼음판이나 다름없었다. 중앙으로 이동하면 대형 사고가 날 것이 뻔했다. 신문이나 인터넷에 내 이름이 올라올 수도 있다. '무모한 스키 초급자가 객기를 부리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설원에서 추락하여 헬기에 실려서...'
중급코스 (끝 부분)
이런 구차한 이야기는 브런치에 올리기에는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미 어차피 시작된 마당이었다. 미끄러지고 나자빠지고 엎어지고 넘어지고 엉덩방아 찧기를 반복하며 내려오다 보니,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곧 눈을 정리하는 장비가 가동될 것이라고 했다. 꼭대기 쪽에서 벌써 장비 몇 대가 눈평면 고르기 작업을 하면서 나를 압박하며 몰려서 내려왔다. 낮은 쪽의 초급코스로 짐작되는 곳에 다 달았을 때 안내하는 직원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은근히 물었다. 도와줄 것이 없느냐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혼자서 내려가겠다고 대답했다. 막내딸이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초급코스 (정상 출발지점)
천신만고 끝에 만신창이가 되어 최종 목표점에 무사히 도착했다. 무려 정상 중급코스 출발(17:03 리프트 탑승)부터 출발지 도착(18:43)까지 사투 끝에 1시간 40분이나 걸렸다. 마니아들이 5분이면 내려오는 코스를! 이제는 일취월장 "초중급"코스에서 내려오면서 뜨거운 담금질로 단련된 몸이 되었다. "초급"코스로 이동했을 때는 30여 년 전의 실력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ㄹ자형 활강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되었다. “중급초급“를 다시 한번 도전하려고 하다가 예약 시간(4시간)이 끝나서 만족하고 마무리하기로 했다. 세상만사 과욕은 건강과 정신을 헤친다.
초급코스 리프트에서 본 스키장
초보자로서 스키장의 하루를 하느님이 보우하사 마무리 지었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이루어졌다. 산꼭대기에서 지팡이를 짚은,근엄하고 웅장한금도끼 은도끼 그분의 목소리가들려왔다."신문에 안 난 것을 천만다행으로 알아! 이것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