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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Mar 20. 2024

수원 화성(水原 華城) 구석구석 (1)

4대 성문(화서문, 장안문, 창룡문, 팔달문)

수원화성 안내도

   수원 화성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마침내 그날(2024.03.16., 토, 맑음, 10도)이 왔다. 사도세자의 뒤주와 효자 정조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창경궁에서 할아버지(영조)는 뒤주에 갇힌 아버지(사도세자)를 풀어 달라고 애원하던 11살 어린 손자(정조)의 피맺힌 절규를 끝내 외면했다. 8일 만에 뒤주 안에서 굶어 죽었다.

뒤주

   수원 화성이 탄생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뒤주가 수원화성을 만들었다. 화성행궁 안에 뒤주가 놓여 있어 직접 체험할 수 있다.     

화셩젼도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영우원, 永祐園)을 수백 년간 수원도호부가 있던 천하의 명당이라는 화산(華山: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건릉)으로 이장하였다. 그 일대의 관아와 살던 백성들을 수원화성으로 이주시켰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을 성하면 주변의 민묘를 이장시키고, 민가 관청등을 이전시켰다.  1793년(정조 17년)부터 화성 축조가 본격적으로 준비되어 이듬해 정월부터 시작해 2년 반 만인 1796년에 5,744m (면적 130ha)의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정약용 선생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고,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완공하였다. 즉, 영조와 사도세자의 뒤주와 정조의 효가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탄생시킨 것이다.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다.     

화성성역의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일부 재건한 건축물이 있었지만, 화성을 계획할 당시 설계도와 기록해 둔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가 있어 인정받을 수 있었다.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거중기 / 녹로

   축성에는 다산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와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었다. 병역의 의무로 동원된 백성들에게도 일반 건설 현장과 같은 적절한 임금을 나라에서 일반 노동자들과 차등을 두지 않고 그대로 지급하였다. 군사 지형학적으로는 수원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과 더불어 남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적군이 한양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는 수도권 지역의 1차 저지선이 완성되었다.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128m)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성문 4개소(북문- 장안문, 남-팔달문, 동-청룡문, 서-화서문),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10, 은구 2개 소등 총 49개의 시설물이 있었다. 이 중 수해와 6.25 전란등으로 시설물 일부가 소멸되었다.     


  당초 계획은 상기코스 탐방 후, 화성의 사도세자 릉(융릉)과 정조의 릉(건릉)도 둘러볼 예정이었으나,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어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다. 축조된 건축물이 워낙 많고 복잡하여, 역할 기능별로 묶어서 설명드린다.      


수원화성 및 성내부 탐방 경로는 다음과 같다.

화서문> 장안문> 화홍문> 창룡문> 팔달문(수원남문시장)>서장대> 화서문(출발점 순환, 전구간 약 3시간 소요, 약 1만 5 천보)>행궁동 카페거리> 화성행궁> 화령전     


수원화성 성곽 설명 순서는 다음과 같다. (굵은 선이 금회 설명분, 성문 : 전체 시설물 위치는 지도를 참조하시고, 건축물이 워낙 많고 복잡하고 용도가 다양하여, 기능별로 별도 정리했다.)

성문> 수문> 장대> 노대> 공심돈> 암문> 각루> 포루(砲樓)와 포루(舖樓)>치>적대  

   

4대 성문

   화성에는 동서남북으로 남문, 서문, 북문, 동문 4개의 성문이 있다. 화홍문(華虹門, 북수문)은 수문이지만 편의상 같이 설명한다.     

화서문 전면


화서문(華西門)

   탐방 출발점이다. 수원화성의 서문이다. 성과 부속 시설물들이 곡선을 차용하여 섬세하고 여성스럽게 아름답다. 마치 동화 속의 성곽 같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져 있다.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과 서북각루를 함께 세웠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화서문 / 여성의 부드러움을 닮은 성곽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우두머리 석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울과 개성, 강화도에서 온 석공이 참여했는데 박상길은 축성이 끝난 후 석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상을 받았다. 현판은 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채제공이 썼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장안문

장안문(長安門)

   북문인 장안문이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장안문 측면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장안문 내부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 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 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 다시 복원하였다. 석축에 동족상잔 6.25 아픔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화홍문

화홍문(華虹門, 북수문)

   화홍문(華虹門) 밑에는 물이 흐른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화홍문 내부 / 남쪽 하천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 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북쪽 하천

   화홍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이 되었다.     

창룡문

창룡문(蒼龍門)

   성의 동문이다.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창룡문 측면 / 내부

   문 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련장(동장대, 연무대)으로 쓰였다.

활터 / 어린 궁사

   활터에서 국궁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성밖에는 애드벌룬이, 성안에는 대형 연들이 하늘에 떠있다. 근처에 화성어차 승차장이 있다.     

팔달문

팔달문(八達門)

   남문이며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일제가 도로를 개설하면서 연결된 성곽을 허물어 버렸기 때문에 홀로 서 있다. 팔달문을 둘러싼 로터리형태로 주위와 차단되어 있다.  

팔달문 주변 방향

   수원남문시장에서 비빔밥을 먹고 다음 행선지를 살피다가 표지판이 화성행궁만을 가리켜고 있어 따라가다가 되돌아 나왔다.   수원화성 팸플릿을 펼쳐보고 다시 발길을 돌려 팔달산 위 서경대(화성장대) 방향으로 올라갔다.

팔달문 안내판

 출처 : 수원문화재단

         수원화성 화성행궁 팸플릿

         위키백과표

         한국민족문화대사전


글이 길어져 수문, 장대, 노대, 공심돈, 암문은 다음 편에 올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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